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로 끌려가 반복적인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 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입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본래 정신대는 전쟁 말기 군수공장 노동에 동원된 제도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제도가 뒤섞이며 생긴 혼란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가해자가 누구였고 무엇이 강제되었는지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표현을 쓰며 이 문제를 인권 침해의 대표 사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뿐 아니라 전쟁 점령지의 수많은 여성을 속이거나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전쟁터 곳곳으로 내몰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조용한 역사를 깨웠습니다. 그 이후 많은 할머니들이 세상 앞에 나와 자신들의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눔의 집은 1992년, 그 목소리를 지키고 일상을 함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동거주지이자 안식처였던 나눔의 집에서는 할머니들이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들이 겪은 고통을 잊지 않고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는 일입니다.
- 192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7년 17세가 되던 해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끌려간 뒤, 3년 동안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일본군 성노예로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겪었다. 1940년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귀국하였다.
- 1991년 TV를 통해 김학순 할머니의 성노예 피해 증언을 접한 후 피해자 신고를 하였으며, 1992년 10월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일본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처녀의 슬픔을 표현한 「끌려감」과 피해 할머니들의 상징이 된 작품 「못다 핀 꽃」 등을 그렸고, 순회전시를 통해 일본군 성노예의 실상을 알렸다.
-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나눔의 집의 ‘사령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텃밭에서 농작물을 가꾸어 수확하며 식생활에 보탬이 되었고, 여러 동물을 돌보며 ‘나눔의 집 동물원장’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2004년 6월 30일, 늘 참여하던 수요시위를 앞둔 아침에 뇌출혈로 쓰러져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