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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희생자 유골 찾는 日 村의원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9-08-29
징용희생자 유골 찾는 日 村의원


홋카이도 사루후쓰村 오사나이 의원.."내년 발굴 재개"


한국을 '가까운 관광지' 정도로만 알고 살던 일본 농촌의 한 지역 유지가 갑자기 마을 인근에 묻힌 한국인 태평양 전쟁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을 찾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인 징용 희생자 유해 20여 구를 수습했고 내년 5월 다시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별난 친한파' 오사나이 코이치(小山內 浩一.46) 일본 홋카이도 사루후쓰촌(村) 의회 의원.

그는 2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학자와 정부 측에 내년 발굴 작업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러 왔다"며 "일본 정부가 나서기를 꺼리는 좋은 일을 시민이 대신 맡는 것일 뿐이다"고 밝혔다.

주변에서 "그런 부담스런 일을 왜 하느냐", "정신병자 아니냐"는 핀잔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웃어넘겼다고 한다.

한ㆍ일 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로 구성된 유해 발굴단 수백 명이 마을에 몰려들자 주민들을 설득해 숙소를 내주고 작업 현장에선 자기가 운영하는 건설 회사의 중장비와 트럭을 빌려줬다.

그는 사루후쓰의 '유해발굴 실행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사루후쓰는 홋카이도 최북단에 있는 인구 3천여명의 농촌 마을로, 태평양 전쟁 때 군사시설을 짓는데 동원됐다가 숨진 한국인 노무자들이 많이 묻혀 있다는 얘기가 간간이 돌곤 했다.

마을의 '잊힌 역사'를 되살린 것은 재일(在日) 시민단체인 '강제연행ㆍ강제노동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이었다.

사루후쓰 인근 지역에서 아사지노(淺茅野) 비행장을 짓다 숨진 한국인들이 버려진 공동묘지 터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정부 문서로 확인, 2005년 10월 현장에서 구덩이에 매장된 남성 유해 1구를 찾아낸 것.

추가 발굴을 하려면 주민의 도움이 필요했고, 마을에서 3대째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오사나이 의원에게 청이 들어왔다.

한국인 유해를 고국으로 돌려보내 과거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논리는 전후(戰後) 세대로 한ㆍ일 역사에 무관심했던 그에겐 생소하기만 했다.

"일본 정부는 보통 강제노역을 '다 해결된 문제'라고 합니다. 옛날 일이란 거죠. 하지만 우리 후손들이 한국인을 만났을 때 아픈 과거가 앙금이 되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아들도 대학생이거든요. 또 저렇게 묻힌 유골을 외면하면 마을의 역사적 진실이 없어질 거란 걱정도 있었죠."

오사나이 의원은 동료 사업가와 지역 시민운동가 등 70여명을 모아 발굴 실행 위원회를 만들고 주민을 설득해 2006년 8월 홋카이도 포럼이 이끄는 한 ㆍ일 발굴단 300여명을 초청했다.

폐쇄적인 농촌 마을로선 이례적 결정이었다.

옛날 묘지 터를 파고 수풀을 치우는 굴착기와 대형 전기톱 등 중장비는 그의 회사 창고에서 빌려줬다.

올해 5월 한 차례 더 발굴 작업을 벌여 모두 유골 20여구를 수습, 인근 사찰에 안치했다.

유골 발굴은 난관이 많다. 수십 년 버려진 유해의 자세한 신원을 알기 어렵고 당시 숨진 중국인 포로나 일본인인지도 유전자 검사로 확인해야 해 고국 봉환(奉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오사나이 의원은 이 과정에서도 얻는 것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한ㆍ일 학자들과 함께 희생자의 사망 경위와 시대 상황 등을 거듭 연구하면서 태평양 전쟁의 역사를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반일, 반한 감정도 풀린다. 학술 자료가 많이 쌓여 나중엔 양국 젊은이들이 편견 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오사나이 의원은 28일 경기 광주시의 위안부 쉼터인 '나눔의 집'과 정부 기관인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방문하고 다음 날 일본으로 돌아간다.



[연합뉴스]

기사원문보기 : http://news.nate.com/view/20090828n0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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