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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의 분노 - "한국 할머니들 투쟁 보고 용기 내 증언"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9-06-10
네덜란드서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성(性)노예전

"일(日), 위안부 문제 진심으로 사과·보상해야"
"네덜란드와 일본은 400년 동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 정부와 국민·기업들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야만적 행위로 네덜란드인들이 고통을 겪은 사실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시켜야 합니다. 일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 전쟁기간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8일 오후 네덜란드 헤이그 시청 1층 로비에서 열린 '한국·네덜란드·독일 성노예전(展)' 개막식에서 J.F 반 와흐탄동 네덜란드 일본명예채무촉구재단(SJE) 회장이 축사를 시작하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와흐탄동 회장은 1942년 일본이 점령한 인도네시아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네살배기 와흐탄동은 두 살 아래 남동생, 어머니와 함께 수용소에 감금됐다. 두살배기 동생은 수용소 막사 근처에서 놀다 죽이 펄펄 끓는 솥에 빠져 숨졌다. 그는 1990년 일본의 인도네시아 점령기에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촉구하는 일본명예채무촉구재단을 결성했고, 1992년부터 매달 두 번째 화요일 헤이그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한 인도네시아에 있던 네덜란드 주민 30만명을 수용소에 가두거나 살해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15~30세 여성들은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 네덜란드 하원은 2007년 11월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했고, 그해 12월 유럽의회에서도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페어베이트(사진 가운데 여성) 네덜란드 하원의장이 헤이그 시청에서 열린 ‘한국·네덜란드·독일 성노예전’을 둘러보고 있다./kichul@chosun.com 이런 배경 때문에 이날 성노예전 개막식에는 페어베이트 하원의장과 함부르흐 인권대사, 후프나헬 헤이그 부시장 등 네덜란드 유력 인사들이 김용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영원 주(駐)네덜란드 대사, 이기항 사단법인 이준열사아카데미 원장 등 한국쪽 인사들과 함께 참가했다.

2009년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와 통상을 시작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은 네덜란드에 스모 선수 30명을 데려와 시범경기를 벌이는 등 일본·네덜란드 관계 400주년을 기념하는 데 열심이다. 김용덕 이사장은 축사에서 "두 나라가 진정한 우호관계를 수립하려면, 역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28일까지 헤이그 시청에서 열리는 성노예전에는 한국·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와 독일 라벤스브뤼크 여자강제수용소에서 강제매춘에 종사한 여성들의 고난을 소개하는 사진과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시청을 찾은 네덜란드인들은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전시물을 유심히 살펴봤다.

왈라번 라이덴대 한국학과 교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잘 모른다. 네덜란드 젊은이들이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영원 주네덜란드 대사는 "하멜의 고향인 호르쿰을 비롯, 네덜란드 10여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알리고 사과를 촉구하는 전시회를 열겠다"고 말했다.


기사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09/20090609019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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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日本軍)위안부 출신 블루흐 할머니
"내 친구 얀 러프 오헤른 사진이 저기 있네요. 정말 용감한 친구예요."

8일 헤이그에서 개막된 성노예전을 찾은 엘리 코리 반 데 블루흐(Ploeg· 86)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 출신이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1942년 봄, 블루흐 가족은 자바섬 중부 스마랑 수용소로 끌려갔다. 2년 뒤 어느 날, 일본군은 병원과 사무실 직원을 뽑는다며 젊은 여성 30명을 골라냈다. 블루흐는 동료 14명과 함께 상류층 거주 지역에 있는 '일자리'에 배치됐다. 일본군 장교를 위한 공창가였다.

60년이 넘은 일이지만 블루흐 할머니는 그 기억을 잊지 못했다. "일본군에게는 쾌락의 장소가 나에겐 두려움과 슬픔, 수치의 지옥이었어요." 그는 반항할 의욕마저 잃었다. 그저 빨리, 다치지 않고 끝나기만 기도할 뿐이었다. 다행히 3개월 만에 풀려나 수용소로 돌아왔다. 수용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입었던 옷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블루흐 할머니는 오랫동안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나서고, 네덜란드에서도 오헤른 할머니가 입을 여는 것을 보고 용기를 냈다. 블루흐 할머니는 일본명예채무촉구재단 도움으로 증언집을 냈고, 일본의 전쟁 책임 인정과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에 증인으로 나섰다. 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는 300여명으로 알려졌고, 그중 10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

"일본 사람들이 자기 반성과 책임 인정에 인색한 것을 보면 화가 나요." 블루흐 할머니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내가 겪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젊은 세대에게 일본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기사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09/20090609019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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