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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한·일 공동책임론으로 풀어야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5-01-24
[한겨레]
사진 전쟁 책임에 대한 독일과 일본 정부의 태도는 자주 비교된다. 위쪽 사진은 지난해 12월1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634차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한 일본 오사카의 시민단체 ‘일본의 전후보상을 실현시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원하는 회’ 소속 일본인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쪽 사진은 지난 2000년 1월27일 베를린에서 열린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기념관’ 기공식에서 볼프강 티어제 독일 하원의장(왼쪽)과 요하네스 라우 독일대통령(오른쪽)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베를린/AFP 연합




<대안> 한·일 공동책임론으로 풀어야

한­일 협정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계기였다. 제국주의적 강탈과 폭압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통해 두 나라 모두 ‘과거사의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한­일 협정은 두 나라의 이해타산에 막혀 또다른 과거사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한­일 협정을 넘어서 이런 ‘과거사’를 바로 잡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당위로서가 아니라, 미래의 아시아를 만들어가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한­일 협정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반성을 요구한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길을 내고 공장을 짓는 데 썼다. 피해자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협상에선 돈의 성격을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고집해 놓고, 소송에선 보상은 이미 끝났다고 강변했다.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피해자들의 권리를 뒷전에 뒀다는 점에선 두 나라 정부 모두 공범인 셈이다.

피해자들은 한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개별 소송을 통해 이런 잘못을 추궁할 태세다. 이번에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에는 그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음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박탈한 양국 정부의 부도덕함에 대한 법적 추궁의 성격을 띤다.

한­일 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 없이 이뤄졌다는 원죄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사죄와 피해자 배상 문제를 넣는 쪽으로 한­일 협정을 개정하자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장희 외국어대 교수는 “한­일 협정에는 군대위안부나 피징용자들의 인권 침해 부분이 빠져 있다”며 “사정 변경의 원칙에 따라 조약의 종료와 재협상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협상 요구 법적 접근은 현실성 희박 한·일성명 형식 '해석 개정' 대안 제기 양국 정부·기업 '사회적 책임' 실마리

그러나 이런 법적 해결은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거부반응을 불러와 오히려 보수우경화한 일본내 보수세력들의 주장에 일본 내 다수가 동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일본이 한-일 협정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현실론이다. 한 역사학자는 “개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태도 변화가 선행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법적 논리로 재단하긴엔 역사의 덩치가 너무 크다는 지적도 이런 회의론을 거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회적 접근방법으로서 ‘해석 개정’이란 대안을 내놓는다. 김영호 전 경북대 교수는 “한­일 두 나라가 공동선언이나 성명을 통해 과거사를 정리함으로써 한­일 협정을 굳이 고치지 않고도 개정하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한­일 기본관계에 관한 협정에 명시된 “이미 무효가 됐다”는 표현에 근거해 ‘당시엔 합법’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제 새로운 상황에 맞게 무효의 시기를 일본의 식민지 지배 당시까지로 소급하는 것으로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담화를 통해 식민지배로 인한 한국의 피해와 고통에 반성 내지 사과의 뜻을 표한 바 있어, 한국이 요구하는 사죄에는 못미치지만 아무런 사과나 책임의식 없이 한-일 협정을 맺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자세를 보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해법의 실마리는 마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과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 피해자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김창록 부산대 교수는 “개별 소송에 의한 피해 구제는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며 법적 해결을 뛰어넘는 사회적 해결을 주문했다. 이런 해법은 우리 사회 전체가 피해자들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이 받을 돈으로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린 이들이 공적 기금을 조성해 보답하자는 것이다. 여기엔 당연히 일본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일본 시민사회도 책임을 나눠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재단을 통해 100억마르크의 기금을 모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에 의해 강제동원된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상한 독일의 사례는 일본에도 참고가 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한­일 협정이라는 어두운 과거사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청산한다면 그것은 북한과 일본, 중국과 일본 그리고 나아가 일본과 아시아의 역사적 화해의 전범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일본은 과거사의 원죄적 책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미래의 개척자로 나서 과거사 청산의 문제를 안고 있는 동북아 각국에 희망의 메시지를 줄때 비로소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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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5-01-21 18: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