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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어떻게 되고 있나]⑴ 특별법 제정과정과 문제점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10-13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어떻게 되고 있나] ⑴ 특별법 제정과정과 문제점

[국민일보 2004-10-10 17:56]




과거사 규명문제로 우리사회가 떠들썩하다. 그 중심에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친일파 청산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반 대중은 논의의 중심에서 배제돼 있다.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서는 친일 규명도 중요하지만 일제에 강제 동원돼 전쟁터,광산 등으로 끌려다닌 800여만명(연인원)에 달하는 한국인들의 진상 규명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시민단체와 유족단체들의 줄기찬 요구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이 입법돼 발효되기는 했으나 이 문제를 다룰 위원회 구성조차 지지부진해 현정부에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본보는 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와 공동으로 5회(매주 월요일자)에 걸쳐 일제치하 강제동원 실태 및 진상조사 방향 등을 모색해 본다.

올해 2월 국회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이란 한시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특별법은 3월 5일에 공포되어 9월 6일에 발효만 되었을뿐,아직도 진상조사 업무를 총괄할 위원회와 실무조직이 구성되지 않았다. 그런 터에 금년 8월 이후 청와대와 여당은 “포괄적인 과거사 청산”을 해야 한다며 과거의 미해결 사건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통합법을 제정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러나 그 통합법은 아직 가시화되지도 않은 상태이다. 법제정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정식으로 국민적 규모의 동의를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부터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마찰을 빚고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통치 영역내의 모든 인원 및 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전면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하였다. 한민족에 대한 강제동원은 총력전 체제의 일환으로서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실시되었다. 남성은 각종 군수 사업체 및 군사시설 공사장의 노무자로, 그리고 군인 및 군속으로서의 병력·준병력 자원에 동원됐고, 여성은 근로정신대와 같은 노동력, 군대 위안부나 집단취로 사업장에서 산업 위안부로 동원됐다. 강제동원 지역은 한반도,일본 본토,사할린,중국 동북부 및 해남도,동남아시아,남태평양 제도 등 일제의 점령 지역 전체에 해당된다. 동원 규모는 연인원 8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그로 인한 피해형태는 사망, 상해, 미불 임금, 미불 보험금, 미불 저축금,심신 장애,피폭 후유증 등으로 다양하다.

한국 정부는 1965년 대일 수교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더불어 경제협력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협정’(청구권협정)을 맺어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유상 2억달러에 해당하는 상품 및 기술·용역을 제공받음으로써 1945년 이전에 발생한 자국민의 대일 청구권은 한국 정부의 책임아래 해결할 것이며, 한국인의 재산권 청구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 일체를 포기한다고 약속했다.

그 후 한국 정부는 1974년에 ‘대일 민간청구 보상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강제동원으로 인해 해방전에 사망한 사람에게만 1인당 30만원을 지급하고,내국인에 대한 보상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정부의 홍보 부족으로 보상 사실을 몰랐던 사람도 많았고,사망 이외의 형태로 피해를 본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또한 생사조차 모르는 피동원자의 유족들도 있다. 이후 그들이 한맺힌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요구가 표면화된 것은 민주화가 급진전된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1989년에 발족된 한국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비롯해 피해자, 유족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그들은 1990년대에 일본 각지의 법정에서 강제동원의 주체인 일본 정부 및 기업을 상대로 보상요구 소송을 일으켰다.

소송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원고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고들은 1965년에 체결된 청구권협정이 현실적으로 넘을 수 없는 큰 장벽으로 존재하며,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이미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끝난 일이다”라는 일본 정부 입장과 다름이 없었다. 또 강제동원 피해 전반에 대해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원고들을 불리하게 하였다. 2001년 말부터 특별법 제정추진운동이 시작된 것은 그러한 보상 요구운동의 연장선에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특별법 제정추진 운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1년 10월에 의원 발의로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고,같은해 12월에는 피해자단체,학술단체,시민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특별법제정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반응은 냉담하여 법안은 심의조차 되지 않았다. 추진위는 국민서명운동,국회의원 서명운동,학술심포지엄,한일협정문서공개 요구소송 등을 전개하면서 입법부를 압박했다. 운동의 정점은 2003년 여름 대부분 80대에 접어든 고령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더 이상 국가에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의미에서 ‘국적포기 운동’을 벌인 일이다. 결국 법안이 무산되기 직전 국회는 과거사 특위를 구성하여 다른 과거사 법안과 함께 2003년 12월초에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하였다. 이때 외교통상부는 대일 외교에 걸림돌이 된다며 법 제정과 한일협정문서 공개요구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은 2004년 2월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법안 발의 후 30개월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김광열(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공동대표·광운대 일본학과 교수)





기사제공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