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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의 대청소가 두려운가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10-09
60년만의 대청소가 두려운가

[한겨레21 2004-10-07 22:21]



[한겨레]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진정한 과거청산은 국가와 사회와 개인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과거를 기억하고, 또 기록하는 능력이다. 이런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 보니 때로 사람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미화하기도 한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에게 들어보면 금방 잡은 붕어를 풀어주어도 다시 돌아와 낚싯밥을 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을 가진 붕어 사회에서야 역사도 과거 청산도 없겠지만, 인간이 모인 사회에서는 역사를 두고 싸우게 마련이다.

해방 뒤 거꾸로 청산 당한 역사

이민족의 강제 점령과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그에 뒤이은 분단과 전쟁,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학살과 군사반란, 그리고 정신없이 빠른 경제성장과 치열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참으로 울퉁불퉁했던 역사를 살아내면서 우리는 단 한번도 제대로 과거 청산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 청산해야 할 과거의 만물상이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 만물상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일만 하더라도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친일 청산의 문제가 있는가 하면, 강제 연행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있다. 해방 뒤에도 4·3이나 민간인 학살, 의문사처럼 한국 정부가 기본적인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있고, 또 노근리 사건처럼 미국 정부가 책임질 일도 있다. 대부분의 사건이 우리가 피해자이거나 우리 내부의 문제이지만,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처럼 우리가 가해자인 경우도 있다. 민간인 학살도 한발 들어가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남북 상호간에 상대방 지역을 점령했을 때 벌어진 일들도 만만치 않게 복잡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한국 사회가 과거 청산의 진정한 기회를 맞이한 것은 해방 직후였다. 그러나 이때 한국 사회는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했다. 아니, 그냥 실패했다고 하면 그것도 왜곡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순한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나 좌절이 아니라,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고 하던 양심적인 인사들이 친일파에 의해 거꾸로 청산당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와해나 백범 김구의 암살,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의 주역들이 모두 친일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해방 직후 이외에도 한국 현대사에는 몇 차례 과거 청산의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 4월혁명은 5·16 군사반란으로, 박정희의 피살과 그에 뒤이은 이른바 서울의 봄은 전두환·노태우 일당이 감행한 12·12와 5·17 등 두 차례의 군사반란으로,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어렵게 찾아온 기회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분열과 김영삼의 군사독재 정권과의 야합으로 인해 놓쳐버리고 말았다.

원래 제때에 제대로 청산을 하고 지나갔어야 할 문제들을 모두 내버려두었다가 뒤늦게 한꺼번에 치우려 하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60년 만의 대청소이니 마음을 합쳐 청소를 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어떤 사람들은 먼지 난다고 빗자루질 하지 말라고 난리를 치고, 어떤 사람들은 청소하는 길목에 태연히 드러누워 방해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먼지 털어내지도 않았는데, 걸레질부터 해야 한다며 법석을 떤다. 김영삼 정권 시절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란 이름하에 부분적으로 광주 문제 등에서 과거 청산이 시작됐고, 그 뒤 김대중 정권 시절에 의문사 진상규명 법안이나 민주화운동 보상심의 관련 법안 등이 통과되면서 과거 청산 문제가 일정하게 진전을 보았지만, 과연 그때나 지금이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할 만한 준비와 역량을 갖추고 일을 시작한 것이었을까? 한국이 단 한번도 제대로 과거 청산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전혀 다른 평가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대통령을 둘씩이나 감옥에 보낸 나라는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차분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아주 실망스러움을 알 수 있다. 전직 대통령을 둘씩이나 감옥에 보내고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강제 연행 관련 법안은 이미 통과됐고, 친일진상규명 법안과 의문사 법안의 개정이 추진되고 있으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통합 법안의 통과가 임박한 상황, 과거 청산과 관련된 갖가지 사항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상황에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청산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혁명적 상황.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프랑스혁명 뒤에 앙샹레짐을 일소한 것처럼 옛 사회의 지배세력이 혁명세력에게 목을 내맡긴 경우, 과거 청산은 당장은 군말 없이 진행될 수 있다. 정치권력이 진짜로 바뀐 다음에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수준에서 진행된 과거 청산 작업으로는 옛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공산정권 시절에 일어난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은 것을 들 수 있다. 혁명적 상황 이외에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는 또 다른 시기는 점점 더 거세지는 혁명세력의 저항에 대해 지배세력이 아직 힘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타협을 추구하는 경우이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보면, 과거 청산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써오던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정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기 위해 이루어졌다.

국가가 주도하는 과거청산의 한계

그러면 남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은 왜 타협했을까? 인도에 관한 죄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을 찾을 것도 없이, 현행법상의 공소시효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건들을 왜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을까?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없이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남아프리카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위원을 지낸 란데라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문제를 좀 시비 걸 듯 물어보았다. 그는 “아침에 죽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날 권리”를 위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즉,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살육을 막기 위해 타협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비판도 많지만, 상당한 권한을 갖고 그 권한에 의거하여 백인정권 시기의 인권 탄압의 총체적인 실상을 파헤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처럼 과거에 발생한 의문사의 총체적인 진실이 아니라 개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는 수준으로 규명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그런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는 데 주어진 권한이란 거의 없었다. 난지도보다 더 큰 쓰레기더미를 치우라면서 달랑 꽃삽만을 준 격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청산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문제였다. 과거 청산이란 청산돼야 할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다 물러난 뒤에도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청산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도 국가기구의 요소요소에 박혀 있고, 국가권력도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가 주체가 되는 과거 청산이 요구됐다. 한국에서의 과거 청산이 복잡하고 지지부진한 이유는 정치권력의 교체가 아주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구세력들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고, 화해하려 하지 않고 있다. 구세력이 완전히 무릎을 꿇은 혁명적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세력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나름대로 화해를 추구하지도 않는 상황,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의 과거 청산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김영삼은 광주의 학살자들이 만든 민정당과 손을 잡는 ‘구국의 결단’을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정권은 5·16 군사반란의 주범인 김종필과 손을 잡고서야 간신히 출범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민주화운동 관련 유가족들은 400여일의 농성 끝에 의문사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공안기관에서 고문과 살인, 가혹행위를 자행한 장본인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현직에 있었거나, 그들이 키워낸 자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권력은 더디지만 조금씩 바뀌었을지 몰라도, 사회적·경제적 권력은 여전히 그대로 유지됐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청산은 국가가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일에 그치지 않고 국가기구에서 또는 사회적 권력망에서 과거의 국가범죄와 관련된 집단을 몰아내는 힘겨운 투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상규명만은 양보할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광주의 학살자와 손을 잡고 대통령이 된 김영삼이 광주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게 만든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서둘러 광주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를 잘 알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광주는 분명 엄청난 학살을 수반한 것이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행한 국가폭력이 어디 광주뿐이었겠는가? 광주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망자가 당시 운동단체들의 주장으로 최대 2천명이었던 데 반해,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의 규모는 사망자만 100만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광주의 경우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보상금이 주어졌는데,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 정부가 책임져야 할 다른 국가폭력의 희생자 규모가 100만을 넘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그렇게 평균적인 개별 보상에 의한 금전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개별 보상을 추구한 거창 법안이 탄핵의 와중에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거부권이 행사됐을 때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은 것도 광주 수준으로 100만명이 넘는 피해자에게 배상을 했다가는 대한민국은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지만, 돈이 풀리면서 광주는 우리 모두의 광주에서 멀어져갔다. 광주를 광주 사람들만의 광주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광주로 기억하며 싸웠던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의 고향이던 광주는 서로 타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광주학살을 가능케 했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신군부의 학살자들이 12년 간 한국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사회적 토양과 국민들의 심리구조는 크게 변하지 못했다. 철저한 진상 규명에 바탕한 자기성찰을 통해 광주와 나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광주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자들과 손잡은 자들은 광주의 진상 규명을 희생시키는 대신, 사면을 전제로 한 성급한 처벌과 돈으로 광주의 의미를 희석했다. 그에 따라 광주란 전두환 등 몇몇 신군부가 일으킨 사건이고, 우리는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면책 심리는 날개를 달아버렸다.

과거 청산에서 책임자 처벌은 양보해도, 배상과 보상은 포기해도, 위령사업은 축소하더라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진상 규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상 규명 없이 명예회복이나 배상, 보상에만 매달린 경우가 많았다. 진상 규명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사회와 개인, 개인과 개인, 그리고 국가와 사회, 국가와 개인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의 과정을 통해 국가와 그 대리인들이 범한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르게 된 상황이 공개되고, 또 피해의 사실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이 알려지면 우리는 사회 내에서 타인이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배경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이 가졌던 공포와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치인 가족사를 밝히자는 일인가

이 땅에 친일의 잘못을 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해방 당시에 그들의 절대 다수는 잘못을 깨달았을 것이다. 누구는 진심으로 뉘우쳤을 것이고, 또 누구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면서 새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될 독립투사들이 자기 정도의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은 관대히 용서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악질 친일파들은 반격을 노렸고 반민특위를 와해하고 살아남았다. 이 악질 친일파들은 빨갱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진짜 애국자이자 반공투사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몬다면서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진짜 빨갱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악질 친일파가 승리의 노래를 구가하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작은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사죄하는 일조차 어쩌면 빨갱이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친일의 과거를 지닌 채 대한민국에서 영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미화하는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남겼건만, 그 중에서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사죄한 책은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드물다. 100만명이 희생된 민간인 학살에도 가해자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도 고백하지 않는 사회에서 고백하는 자는 바보가 된다. 고백이 없는 사회, 반성이 없는 사회, 이것이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며, 과거 청산 작업이 넘어야 할 크나큰 산이다.



과거 청산 요구가 거세지면서 언론은 때 아니게 유력 정치인의 아버지들이 그 암울했던 시기에 어떤 일을 했는지에 관심을 쏟았다. 과거 청산이 과연 누구 아버지, 누구 할아버지가 뭐했다는 족보를 캘 만큼 한가한 일인가? 과거 청산은 개인의 족보를 파헤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건 호사가들에게 맡겨도 되지, 국가가 나서서 할 일은 아니다. 친일 청산과 관련해서 우리가 밝혀야 할 부분이 친일파들의 일제강점기의 행적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좀 과장해서 얘기한다면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에 행한 잘못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살해·고문한 것이 아니라면 다 봐줘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규명하여 역사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은 친일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해방 뒤에 어떤 짓을 했는지이다. 일본군 중위나 동네 면장을 지낸 특정한 개인이 일제강점기에 무슨 짓을 했나보다도, 반민특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와해됐고, 백범 김구가 어떤 세력에게 암살됐고, 이렇게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장악하여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군사독재를 실시했는가이다. 친일과 민간인 학살과 군사독재 시기의 인권침해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밝혀내는 일, 이것이 포괄적 과거 청산이다.

우리가 과거 청산이라 부르는 작업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국가가 범한 인권침해 등 국가범죄를 국가가 직접 국민들에게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과거 청산을 역사학자들에게 맡기자고 한다. 과거 청산과 역사 연구는 부분적으로 겹치는 영역이 물론 있겠지만, 엄연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 청산 작업에서 전문성을 살려 기여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지만, 과거 청산의 주체는 역시 가해자였던 국가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기구인 중앙정보부가 행한 인권침해 사건을, 그 사건을 가지고 논문을 쓴 연구자가 대신 피해자에게 사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본 극우파의 망언을 보라

과거 청산은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로서 국가가 해야 할 일과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그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정부는 정부가 직접적인 가해자였던 민간인 학살이나 의문사 같은 문제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때의 강제 동원처럼 별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문제에서조차 오히려 피해자들이 국적포기운동을 벌일 정도로 피해자들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청구권 협정 체결 경위를 밝히고 문서 원본을 공개하라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일본과의 외교 마찰 가능성을 이유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꼬인 과거 청산 문제를 정부가 정말로 풀 의지가 있다면, 큰 비 오면 여기저기서 지금도 드러나는 민간인 학살 유해를 나서서 수습하고 일본에 방치돼 있는 유해를 모셔오는 일부터 당장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과거 청산, 그거 지금 꼭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60년을 안 하고도 살아왔으니 그런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과거 청산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면, 나는 고개를 돌려 시도 때도 없이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극우파들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단 한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어떤 모습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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