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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수산 선생님의 컬럼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07-11
소설가 한수산 선생님의 컬럼(가톨릭신문 제2406호 2004년 07월 11일자 (주간발행:1927년4월1일 창간)사설)

위안부 할머니의 못다 핀 꽃

일본 사죄·보상받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

일본 사죄·보상받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

「못다 핀 꽃」이라는 그림을 내가 처음 본 것은 5년 전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애잔하게 슬픔과 그리움이 결을 이루고 있는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무언가 범접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냥 그림이 아니라 자수 그림이었다. 한땀 한땀 색실로 떠 나간 한 소녀의 전신상. 그리고 소녀의 몸을 감싸듯 휘돌아간 꽃봉오리.
저게 무슨 그림이냐고 묻는 나에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 역사관의 담당자는 잔잔하게 몇 마디 그 그림의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소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온 한 할머니들의 내상(內傷) 치료를 위한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그림을 그리는 일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 프로그램이 이룩한 성과물인 「못 다 핀 꽃」이라는 화집을 뒤적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 그림의 작가가 김순덕 할머니였다.
김순덕 할머니. 경북 의령 출신으로 1921년 봄날에 태어났다. 가난을 이기지 못해 여공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서 일본으로 다시 중국으로…. 「위안부」가 되어 끌려 다녔다. 소녀가 이루려던 꿈은 그렇게 못다 핀 꽃이 되었다. 지난 6월 30일. 이 김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일본군 「위안부」.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적는다. 실로 어처구니없도록 불행한 일이었지만, 과거사에 대한 우리사회의 의식은 「이승연 누드 파동」이 보여주듯 마비되어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라도 해서 잊혀져가던 과거사 문제의 하나를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 식칼을 들이대듯 각인시켜야 했다니.
이분들에 대한 이름도 혼란스럽다. 군국주의 일본이 스스로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니 「정신대」니 하는 말을 그대로 쓰면서도 아무 의식이 없었다. 차라리 「일본군 성노예」라고 못 박았으면 좋았으련만. 우여곡절 끝에 이제야 겨우 그들은 「할머니」라는 새로운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고, 공식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적게 되었다. 정론(正論)만이 아니다. 정명(正名)에도 치열해야 한다.
「공개증언」이라는 어려운 결단을 한 이후, 「나눔의 집」에 입소한 김순덕 할머니는 건물 옆 밭을 가꾸며 농장주인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던 할머니의 삶은 끊어졌던 그 「못 다 핀 꿈」과 다시 아스라하게 맺어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여성의 인권을 생각하는 시민단체들과 연계되면서, 1992년부터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대사관 앞의 「수요집회」에 참석함은 물론 국내외를 오가며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실태를 고발하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수많은 증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할머니들은 자신을 단순한 「피해자」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전쟁 속에서 여성의 인권이 어떻게 보호받아야 할 것인가를 환기시키는 「주체」이자 「현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렇게 이분들이 한분 한분 돌아가시면서 우리들 치욕의 과거사도 잊혀져 가야 하는가. 「친일인명사전」이다, 「강제동원 특별법」이다 등 이 정권 들어서서 과거사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 셈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던 이들에게는 좀 더 다른 시각이 요구된다. 이 범죄는 그 무엇보다도 반인륜적이며 극악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어린 처녀들을 속여서 잡아다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감금하고 그 문밖에서 일본군은 바지춤을 잡은 채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니!
이러하거늘, 이 나라의 「정권」들은 마치 일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해 왔다.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 과거를 말하지 않겠다!
문제의 해결은, 그분들의 원혼을 달래 줄 우리의 몫은 단순하고도 단순하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죄와 보상과 반성이다. 「못 다 핀 꽃」을 누가 피워낼 것인가. 일제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이제 그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목을 겨누고 있는 칼이며 몫이다.
고맙습니다. 김순덕 할머니. 할머니들의 이름은 이제 피해자가 아닙니다. 여성의 인권을 향한 투쟁의 주체입니다. 분쟁지역에서 유린당하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전위입니다.
고이 잠드소서. 그토록 끼고 싶던 옥반지 끼시고, 도련이 아름다운 치마저고리 휘날리며 훨훨 가소서. 못다 핀… 그 꽃, 아름드리로 피어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