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증언대에 서며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05-07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증언대에 서며

흐르지 않는 강가에 흐르는 낮은 목소리

나는 〈상처의 강〉 앞에 앉아 있다. 나눔의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찾을 때면 나는 늘 이곳에 앉아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곤 한다. 찾을 때면, 이라고 했지만 그래 봐야 고작 세 번째 방문일 뿐이다. 지난해 4월과 10월, 그리고 해를 넘겨 이번 5월. 〈낮은 목소리〉 연작을 보며 나눔의 집에 오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꽤 늦게야 이곳에 당도했다. 90년대의 중반과 후반을 다 보내고서야 비로소 찾아왔던 것.
오고 싶다, 고 썼지만, 나는 여기서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정말 나는 오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 번쯤 와 봐야 하는, 그런 의무의 공간으로, 하여 지켜지지 않은 의무가 부채가 된, 그런 공간으로 계속 남겨 두었던 것은 아닐까? 아직 이곳에 당도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나는 그들 역시 여전히 와야 한다, 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변영주 감독이 〈낮은 목소리〉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영문 제목을 ‘Habitual Sadness’라고 붙였던 것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 스스로 자청한 부채 의식을 겨냥한 것일지도 모른다.


흐르지 않는 강이, 흐른다
이곳에 올 때면 언제나 햇살이 좋다. 나는 찬란한 그 빛, 빛들 아래 〈상처의 강〉 앞에 있는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강’을 내려다본다. ‘강’은 흐르지 않는다. 그것을 ‘흐르는 강’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해석이고 상상이다. 아니, 동감과 연민일까? 메마른 작은 돌들 위에 자리 잡은 몇 개의 나무 더미들 사이로 그렇게, 흐르지 않는 강이, 흐른다.
〈상처의 강〉은 박해영이 1998년에 나무로 만든 조각 작품이다. 소나무, 괴목, 은행나무로 만들었다는 배와 사람들이 거기 있다. ‘상처의 강’이라는 국문 제목 아래 ‘Sacrifice River’라는 영문 제목이 달려 있다. 그러니 이것은 상처의 강이면서 희생의 강이다. 상처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몸, 개인의 역사, 주관적인 어떤 기억을 상기시킨다. 희생은 누군가의 상처를 바라보는 눈, 집합적인 역사, 객관적인 어떤 시선을, 마찬가지로 상기시킨다. 상처를 희생으로…. 그 전이의 과정 속에서 개인과 집단이 만나고, 역사의 해석이 개입하고, 주관과 객관이 변증적으로 몸을 섞는다.
배는 모두 세 개인데, 맨 앞에 있는 배 위에는 그저 작대기처럼 보이는 나무 상 하나가, 굵직한 나무 기둥에 기대서 있다. 나무 상의 뭉툭한 한쪽 끝을 가만 보고 있으면, 거기 조심스레 얼굴 하나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처음엔, 모든 디테일을 생략한 절규의 표정으로 보였다. 분노의, 거센 노함의 얼굴로도…. 그건 상처와 희생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이 고작 그 정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해의 폭이 지금 더 넓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제 얼굴은 절규와 분노의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자리에 앉아 그것과 계속 마주하다 보면, 얼굴은 때로 평온한 화해의 얼굴이고, 때로 모든 표정을 지운 ‘얼굴’이 되기도 한다.


이름을 가진-존재하는
나눔의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경기도 광주에 있다. 서울에서 한 시간여 떨어진 이곳에 열 분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뭉뚱그려 할머니들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름을 가진 할머니-들인 것. 강일출, 김군자, 김순덕, 박두리, 박옥련, 박옥선, 배춘희, 이옥선, 지돌이, 한도순. 지금은 여기에 이름이 없는 강덕경 할머니와 김학순 할머니가 이미 그러했듯 이 명단은 뺄셈을 거듭할 것이고, 그리고 어느 순간 0이 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곳 나눔의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수의 할머니들이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 생활하고 있다. 2003년 5월을 기준으로 ‘위안부’ 피해자신고센터에 접수된 국내 신고자는 205명, 그중 생존자는 129명이다. 1992년에 피해자신고센터가 처음 만들어졌으니 10년 사이 76명의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났다.
이곳 남한에 129명, 그리고 북한과 중국, 일본에, 또 이미 돌아가신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처럼 남방 어딘가에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또 중국과 필리핀, 타이완, 오키나와, 또 인도네시아 등, 일본이 점령했던 각 지역의 사람들 중에도 성노예 ‘위안부’로, 지워진 기억을 가져야 했던 이들이 살고 있다. 살고 있지만, 그리고 하나씩 둘씩 증언을 하고 일본 정부에 지워진 기억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해결된 것은 없다. 할머니-들은 미완의 과제를 가지고, 살고 있다.
진실로는 불충분하다
나눔의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찾는 사람들은 먼저 나눔의 집 소개 비디오를 시청하게 된다. 그리고 안내에 따라 역사관을 견학한 후,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는다. 5월의 방문 날, 나는 열네 명의 일본인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비디오를 보고, 견학을 하고, 증언을 들었다. 동행의 방문객들은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음악가 구로타로 구로사카 씨와 그 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엔 ‘한국 역사 우호의 여행’이라고 적혀 있다.
비디오는 강덕경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영안실에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들이 여럿 앉아 있고, 누구인지의 오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투쟁을 더 해야 되는데….”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것도 아니고, 오래오래 살면서 손주들 재롱을 보라는 것도 아니고, ‘투쟁을 더 해야 되는데…’이다. 이 말이야말로 강덕경 할머니의 삶을, 단박에 축약한다. 그 말에 화답하듯, 생전의 강덕경 할머니 모습이 나온다. 코에 구명호스를 끼운 할머니는 들릴듯 말듯 “진실을 위해 끝끝내 싸워야지”라고 말씀하신다. 역사관과 나눔의 집 사이에 있는 강덕경 할머니 추모비 뒤에는 강덕경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투쟁한 김순덕 할머니가 강덕경 할머니에게 전하는 말이 새겨져 있다. “몇몇 해 같이 살았는데 네가 소원한 것 하나 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1998. 2. 2.”
강덕경 할머니는 생전에 일본 정부에 두 가지를 요구했다. 사죄와 배상. 사죄는 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고, 배상은 그 진실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이었다, 따위의 말이 아니라 국가의 이름으로 할머니(들)의 역사를 인정하라는 말. 개별 시민들의 모금에 국가의 성의 표시를 보태는 정도로 입막음 보상을 할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정식 배상을 하라는 말.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식민시대의 책임이 끝났다고 발뺌하지 말고,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하고, 미안한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하라는 말.
5만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추정치만 있을 뿐 ‘위안부’의 기억-상처를 가진 이들이 전부 얼마나 되는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얼마나 많은 곳에 군대 위안소가 세워졌는지, ‘위안부’ 제도라는 것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기획되고 어떻게 그렇게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실행될 수 있었는지, 그 정확한 내막과 진상은 여전히 미궁 속에 갇혀 있다. 사건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의 공백지대를 근거로, (바로 이 전쟁범죄의 증거를 은폐, 파기함으로써 진실을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한 장본인인) 일본 정부는 자신에게 아무런 책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사죄도 없고, 배상도 없다. 진실은 스스로 ‘나는 위안부였다’고 밝힌 할머니들의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기록된 사실의 부재 혹은 결락을 이유로, 부정된다.


역사는 어디에 기입되는가
방문객들은 이제 역사관으로 들어선다. 역사관 두 동의 건물 외벽에는 임옥상 씨의 청동조형물 〈누가 이들에게…〉가 전시되어 있다. 입구 쪽 벽면에 걸려 있는 조형물은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꽃 위로 다섯 개의 총검이 솟아나 젊은 여인의 육체를 꿰뚫고 있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총검도, 여인도, 일본의 상징 국화도 다 가리고, 사진을 찍는다. 이것은 딜레마이다. 모든 역사적 기념의 공간들이 감수해야 할 딜레마. 〈누가 이들에게…〉는 방문객들의 눈과 대면하지 못하고, 그들의 뒤통수와 마주한다. 찰칵, 찰칵. 비디오를 보고 나와 눈물을 훔쳤던 그 손으로 셔터를 누른다.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 역사관으로 들어서면 바로 마주하는 말. 역사관은 이 말 속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둔다. 이건 그저 전쟁의 참극을 기록하고 고발하겠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강요에 못 이겨 하루하루 또 하루 내내 해야 했던 일, 개인의 기억 안에 트라우마로 남은 바로 ‘그짓’을, 그 강간의 역사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어디의 역사, 누구의 역사에 기입되는 것일까? 민족의 역사 속에? 50년 동안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을 발언하지 못하게 했던, 그저 수치로 가두게 만들었던, 그 민족국가의 역사에?


봉인된 입들, 말들, 기억들
나는 물음표들을 건너 역사관으로 들어간다. ‘위안부’ 문제의 전체적인 흐름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인 ‘증언의 장’에는 ‘위안부’ 문제 관련 연표와 일본군 위안소 분포도,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황과 ‘위안부’ 제도에 대한 소개, 어떤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었는지 등을 알리는 패널들이 전시되어 있다.
‘증언의 장’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체험의 장’이다. 그림으로 표현된 동원 과정과 ‘위안부’의 증언을 통해 재현한 위안소 내부, 그리고 위안소 생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와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모형으로 재현된 위안소 맞은편에 전시되어 있는 콘돔은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는 마초적-군국주의적 이름을 달고 있다. 병사들이 붙인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일이 강간이었음을 증거한다. 전투의 하나가 되어 버린 강간! 임의적이고 돌발적인 강간보다, 어쩌면 더 개인의 내면을 황폐하게 하고, 일상으로의 사회로의 복귀를 어렵게 만들었을, 지정된-일상적인 집단강간! 정액과 오줌으로 뒤범벅된 저 위안소 침대 위에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강덕경은, 김순덕은, 박두리는, 사라졌을 것이다. 개인이 지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보지’뿐이다.
역사관 연구원 야지마 쯔카사 씨는 자신이 보았던 사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은 여인의 누드 네 장 위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을 합성했던 사진. 야지마 씨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그것이 곧 당시 군인들이 ‘위안부’를 대했던 시선을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군인들에게는 그저 목 아래가 중요했을 뿐이라고, 김순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각기 다른 생김을 하고 있는 얼굴 따위야 큰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그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강간을 하면서 상대의 눈을 또렷이 쳐다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해병대원으로 오키나와 등에서 근무했던 크리스 화이트는 “전쟁 상황에서 강간은 재래식 무기와 같은 하나의 무기”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영화 하나를 인용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한 전투 부대가 베트남 여성을 납치해 강간하고 살해했던 사실을 영화로 만든 〈전쟁의 사상자〉가 바로 그것. 영화에서 주인공 메서브(숀 펜)는 한 손에 총을 쥐고 이렇게 말한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무기라고 말하지. 하지만 아니야.” 메서브는 다시 다른 한 손으로 사타구니 사이를 부여잡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진짜 무기지.” 이 적나라하고 솔직한 인용.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에서 벌어졌던 전쟁강간은 베트남을 거쳐, 르완다에서, 이라크와 터키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서 거듭 벌어진다. ‘자지’는 무기가 된다. 그리고, ‘보지’는 입을 닫는다. 그곳들에서도 50년의 세월이 필요할까?


전장은 이곳에
다시 계단을 오른다. ‘기록의 장’이다. 앞 전시관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인지 오늘은 아무도 향을 사르지 않는다. 오늘따라 촛불들도 모두 꺼져 있다. 윤석남의 〈빛의 아름다움, 생명의 존귀함〉 앞에 마련된 ‘원혼을 위한 터’엔 촛불의 온기 대신 서늘한 기운이 잠겨 있다.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앞선 두 번의 방문에서 나는 ‘체험의 장’을 담담히 지나쳤었다. 통나무 민박의 내부를 구경하듯이, 내 시선은 습관적인 두리번거림으로 그곳을 그저 지나쳤었다. 세 번째 방문, 비로소(어쩌면 우연히) 나는 대한민국 서울 옆의 한 작은 기념관에서 베트남과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를 발견했다. 나는 촛불도, 향도 사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환한 밖으로 나온다. 전쟁강간은 이런 환한 햇빛 아래서도 자행되었겠지. 어둠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습관이 된 범죄.
다시 ‘기록의 장’으로 향한다. 이곳은 역사관 안에서 가장 큰 전시공간이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시작부터 수요시위에 이르기까지의 관련 자료들과 위안부 관련 사료, 유물, 기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정원철의 작품인 〈증언〉은 역사관의 무게중심과도 같다. ‘증언’을 한 할머니들의 얼굴이 세밀화처럼 목판화로 그려져 있고, 군데군데 아직 증언하지 않은 할머니들을 위해 검은 얼굴 윤곽들이 남겨져 있다. 작품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증언했던 김학순 할머니의 얼굴 위로 조명이 들어오면서, 할머니의 육성이 흘러나온다.


murmuring
“내가 일본군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신문과 뉴스에서 나오는 거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이거는 바로잡아야 한단 말이여.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여.
그래서 참 내가 결국은 나오게 됐어요.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나왔습니다. 아, 인제 내가 내 나이가 70이 다 됐어. 이제는 이만 한 나이 다 먹고 이젠 죽어도 괜찮애. 그래도 나올 땐 좀 무서웠어요.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꼭 하고야 말거야. 언제든지 하고야 말거니까….
내 팔을 끌고 이리 따라오라고… 그래서 따라가려고 하겄어요? 무서우니까, 안 갈라고 반항을 하니까, 발길로 차면서 그러면은. 참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기가 막혀… 발길로 차면서 내 말을 잘 들으면 너는 편할 것이고… 내 말에 반항하고 니가 안 들으면 너는 여기서 죽은 거야.
여기가 지금 어딘지 알고 반항을 하냐고… 그때 결국은 이 사람한테 참, 기집애가 처음 인제 강간을 당하는 그 참혹함… 말이 나오지가 않아 못하겄어요. 강제로 옷 다 찢기고… 내 도로 열일곱 살 때로 돌려 주세요.
절대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서로 알아야 하고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 갖고도 안 된단 말여. …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후세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고….”
동행의 일본인들은 이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증언’이란 단지 발음된 ‘언어’를 정확히 알아듣는 그런 것이 아닐 게다. 저 머뭇거림, 저 떨림, 저 침묵들, 성내지 않는 저 ‘낮은 목소리’를 그들도 듣고, 느낄 것이다. 저이가 증언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듣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증언’의 핵심을 이룬다.


닫힌 내부, 닫힌 외부
계단을 따라 다시 2층으로 올라가면 ‘고발의 장’이다. 계단부터 시작해서 이곳에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과 강덕경 할머니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몇몇 그림은 이제 아주 친숙하다. 자수와 그림이 함께 담긴 김순덕 할머니의 〈못다핀 꽃〉에는 ‘花盛幸運’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꽃은 활짝 피었으니 행복하겠다”라는 뜻. 나는 이 말이 좋다. 무심한 듯 담담한 말. 지나간 날들은 참혹했으되, 거기에 더 이상은 갇혀 있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가 느껴지는 말. 그런 담담함은 ‘민족의 순결한 딸이 강간당했다’는 (그래서 한편 궐기대회식으로 분노를 표하되, 더 이상의 진실 찾기에는 무감한, 아니, 일본에만 적의를 돌리고, 우리 내부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 그런 무거운 공모에서 벗어나 김순덕이라는 개인의 이름, 김순덕이라는 개인의 역사, 김순덕이라는 개인의 존재를 찾고 만들어 낸 ‘위안부’ 운동의, 성과에 터하고 있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와 출구 쪽으로 나오면 마지막 공간 ‘맹세의 장’이다. 이곳에는 할머니들의 손바닥을 흙에 찍어 구운 핸드 프린트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사죄, 배상을 거부하면서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내놓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민간기금)에 반대하는 서명대가 있다. 또한 역사관 건립 후 이곳을 찾은 이들의 지문 도장에 의해 만들어진 강덕경, 김학순 할머니의 얼굴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증언, 우리가 만나고 있다는
나눔의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 방문은 언제나 증언으로 끝난다. 오늘은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다. 일본 손님들은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는 타이완의 신죽新竹에 있는 위안소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증언의 대강은 김학순 할머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끌려간 이야기, 매일 지겹게 계속되었던 강간의 경험, 그리고 칼에 찔리고, 불과 전기고문까지 당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통역이 한마디 한마디 전할 때마다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할머니는 일본어로 한마디 하겠다고 하시더니 한참을 이야기한다. 지난 10월의 방문 때 이옥선 할머니는 당신의 속내를, 깊고 깊은 저 기억의 이야기들을 더 잘 전달하고 싶다며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고 하셨다. 이제 할머니는 끊기거나 별다른 막힘 없이 일본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만큼 당부하고 싶은 것, 전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옥선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 일본 노래 몇 소절을 부른다. 거기 있는 일본 사람들도 모르는, 황군皇軍의 노래…. 나는 할머니, 당신의 육체적 고통의 기억보다 아직도 선연히 떠오르는 저 황군의 노래에서 식민지를, 그 식민시대를 거치며 가져야 했던 슬픈 역사를 본다. 자신을 순간 순간 배설창구로 이용하는 황군들의 노래가, 가슴에, 기억에 스며 버린 이 역사.
그 이옥선의 역사에 접속되며 훌쩍임이 커진다. 단지 연민 때문에? 동정 때문에? 내가 저 이옥선의 자리에 놓일 수도 있었다는 자기동일시 때문에? 다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다여서는 안 된다. 이들은 이옥선 할머니, 그 개인의 증언을 들으며, ‘역사적 비극’이라는 한마디로는 축약 불가능한 세계와 만났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나와 당신이 ‘증언’이라는 사건을 만들고 함께 경험하고,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되고, 그 ‘우리’가 함께 공유할 어떤 역사를 만든 것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상상한다, 나는 대변한다
오카 마리는 ‘증언’에 대해 이런 문장들을 남겼다.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당신에게,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당신에게 도대체 어떻게 말하면 좋단 말인가? 그것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쓰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기억을 증언한다는 행위, 그 증언을 들은 사람이 그것을 ‘사건’으로서 다시 타자에게 말하려고 할 때, 나 역시 새로운 증언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건을 증언한다는 것이 원리적으로 내포하는 곤란함을 나 역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라는 것.”
나는 오카 마리가 이야기한 바로 그 곤란함 속에, 서 있다. 나의 말들은 조리를 놓치고, 나의 말들은 쉽게 비약한다. 그래도 나는 그 곤란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증언자가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전에 이곳을 찾았던 한 일본 여학생의 편지 속에 나의 믿음이 있다. “상상과 대변代辯을 계속하는 것이 나눔의 집을 찾았던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과 대변, 그것을 통해 그 여학생은 이제 증언자가 되었다. 나는 열네 명의 동행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상과 대변의 작업을 기꺼이 선택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경험이다. 이미 할머니-들의 역사에 접속하고, 그리고 거기에 개입한 새로운 증언자들,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희망을 건다.

진용주 / 출판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