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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면죄부가 된 친일진상규명법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04-23
친일파의 면죄부가 된 친일진상규명법

17대 국회는 올바른 법 개정을 위해 적극 나서야

조세열 사무총장

역사의 길목에서
사상최악의 국회로 평가 받은 16대 국회는 이제 국민들의 단호한 심판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구세력의 급격한 쇠퇴와 새로운 기운의 태동을 지켜보면서 20세기와 21세기를 가름하는 시대 변화의 와중에 서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탄핵정국과 이어진 총선 결과에 따른 의회권력의 교체와 진보세력의 진출 등은 단순한 정치적 현상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차원이 다른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정치 지형의 변동에 흔히 생각하는 게임의 법칙과는 다른 거대한 역사의 손길이 작용하였다고 본다면 과도한 판단일까.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민주주의의 상식을 저버린 다수의 구시대 정치인들이 동반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수구기득권세력의 현저한 퇴조라 규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정치권 내부의 발전과정이라기보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이루어진 국민의 선택에 따른 강요된 결과였다.
16대 국회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생래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 알다시피 한국 현대 정당사는 일탈된 정치행태로 일관하였다. 보 혁의 정책대결은 고사하고 부패와 야합으로 일관하여 그 도덕성마저 의심 받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축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세력이었고 다른 쪽은 지주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세력이었으며, 더욱이 친일세력과 그 아류를 주요기반의 하나로 출발한 원죄를 안고 있었다. 물론 한 쪽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기에 이 같은 평가가 가혹하다 강변할 수 있겠으나,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정권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과거사 청산이 되지 못한 책임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득권세력이 오랜 기간 정치권력을 분점해 왔다는 사실에서 역사청산이 지연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이제야말로 상식에 기초한 과거사청산이 가능한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세대로 보든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보든 상대적으로 과거의 주박에서 풀려난 정치인들이 압도적으로 의회에 진출한 것은 국가 차원에서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청산이 추진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해준다.
지난해 말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 전액 삭감이라는 폭거에 격분한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모금운동은 단 11일 만에 3만 명이 참여 목표액 5억을 채우고 이제 국민모금운동으로 전환하여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라 불릴만한 이 사건은 네티즌들의 관심과 현실참여가 일상사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 역사인식의 분야에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대 사변이라 할 만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미 정보화 시대의 특성을 지적하고 향후 추세를 예견해 왔지만 우리나라만큼 역동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아직 없다고 한다. 아니 우리의 인터넷 문화가 새로운 패턴을 창출하고 주도적으로 다른 나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더 이상 소수 지배권력의 잘못된 결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거나 침묵하는 시대는 끝장이 나고 있는 것이다.
한 네티즌이 제안했던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의 힘으로’ 캠페인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기성정치권의 퇴행적 역사인식에 대한 전국민적 저항이자 준엄한 경고였다. 결과적인 분석이지만 야당이 국민모금운동이 지니는 상징 부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면 탄핵이라는 무리수도 아예 생각조차 않았으리라.
16대 국회는 체질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과거와 다른 여론의 전면적 압박에 결국 굴복하여, 발의된 과거사 관련 4대 특별법안(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안,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 동학농민혁명군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안, 6.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법률안) 중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을 제외한 과거사 3법(강제동원진상규명법, 친일진상규명법, 동학명예회복법)을 제정하였다. 어찌 보면 역사청산의 전기를 마련한 국회로 자부할 만도 하였다. 또 분명 특별법 통과는 의미 있는 역사적 진전이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청산 문제를 국가기관이 맡아 재추진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16대 국회는 스스로 이러한 영예를 저버리고 반역사적 국회라는 오명을 짊어지고 말았다. 이미 제정된 과거사 3법은 심의과정에서 일부 주요조항이 삭제되거나 심하게 수정되어 개악의 수준에까지 이르렀고,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안은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부결되어 그 희생자 유족들의 지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결된 법안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통과된 법안조차 그 내용을 뜯어보면 한나라당이 주역이 된 16대 국회가 과거사청산 특별법을 무력화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입법례를 남겼다는 외에 이들 법안의 제정 의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특별법을 제정한 16대 국회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과거사 청산이 힘들다는 교훈을 남겨준 셈이다.

반민법의 부활과 한계
1949년 반민특위가 국가권력의 사주를 받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좌초된 이후 무려 55년 만에, 친일청산이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재등장하고 공공연히 총선공약으로 제시될 만큼 공론의 장에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는 사실은 친일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얼마 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진전과는 별개로 친일문제는 여전히 난제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미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러 피의자와 피해자 또는 증언자는 극소수만이 생존해 있는 상황이며, 자료는 멸실되고 후손들이나 인맥 학맥 등으로 구축된 연고자들의 격렬한 반발도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은 친일진상규명이 철저히 증거에 입각해 추진되어야 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 진상조사의 근거가 될 특별법은 법안 자체가 지닌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조사 기준과 대상, 조사 방법, 조사 주체, 조사된 내용의 정리와 활용, 그리고 정치적 악용의 배제와 외압의 방어 등을 고려해 충실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누더기가 된 법안의 문제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김희선 의원이 제출한 원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김의원이 제안한 원안은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과 현행의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참고하여 입안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공청회 등 여론의 수렴과정이 불충분하고 학계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 먼저 반민법과 진상규명법의 차이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반민법은 해방이후 반민족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법적 청산을 목적으로 신체형과 재산몰수까지 규정한 전형적인 처벌법이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진상규명법은 진실에의 접근이 목표가 되어야 했다. 최근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계 전문가의 절대 다수는 친일청산이 역사적 학문적 청산이어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관련자 거의 대부분이 이미 사망하였으며 생존해 있더라도 팔순이상의 고령이어서 처벌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자료와 증언 부족에 따른 형평성의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반민법은 상당부분 제보에 의존한 바 컸다. 이렇게 본다면 진상규명법은 발상부터 철저히 진상규명에 두었어야 했다고 본다. 원안의 맹점은 무리하게 다른 법안을 모델로 채택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양산하고 말았다는 점일 것이다.
즉 반민법을 원형으로 삼았기 때문에 친일행위를 세밀히 규정하게 되고 조사대상을 국한하는 우를 범하였으며 의문사법의 조사 조항을 원용함으로써 마치 특위가 수사기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만들었다. 기실 반민법이나 의문사법이 제대로 된 법이 아님은 공지의 사실이다. 반민법은 처벌을 전제로 하였기에 해방정국의 제정파의 현실인식이 투영된 타협적 법안이 되고 말았다. 즉 반민법은 입법 당시 친일혐의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는 일부 비판을 받았으며, 시행과정에서도 다수의 언론인·문화예술인·군인 법조인들이 제외된 한계를 지닌 법이었던 것이다. 의문사법의 경우 특위 자체에서 거듭 개정안을 낼 정도로 미비한 법안임에 틀림없다. 의문사위는 사안의 특성상 실질적인 수사권 확보가 성패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친일진상규명법은 효과적인 조사에 최대 초점이 두어져야 마땅했다. 광범위한 자료의 수습 정리와 이를 통한 진실규명 이것이 목표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세부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마치 조사대상의 범위가 친일파의 범위로 오인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만 것이 원안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할 수 있겠다. 법적 처벌이 전제된다면 오히려 반민법보다 더 치밀한 세부규정이 필요하겠으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학문적 진상조사에 그친다면 포괄적인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조사대상에 제한이 있다는 말은 진상규명을 제한적으로 하자는 말과 같아 그 형평성에 있어서도 크게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자칫 친일파를 선정해 놓고 증거를 수집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조사대상은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저질러진 모든 친일반민족 ‘행위’가 되어야 하며 이는 친일파 규정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선 조사, 후 진상규명’의 관철 없이 제대로 된 조사는 불가능해 보인다. 즉 조사대상을 확대하고 치밀하게 행적이 조사된 연후에, 그 죄질로써 반민족행위 또는 부일협력의 성립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의 친일 행위와 그 양적 질적 집적으로 판단될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일단 논리적으로 구분되어야하고, 무엇보다 광범위한 조사활동이 선결과제임을 다시 강조해둔다.

친일의 원죄와 상속자들
발의된 법안이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 법안의 취지는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정의의 실현이라는 대의에 입각해 있기에 그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또 문제되는 조항은 차후 부분 개정이나 시행세칙을 마련해 본래의 취지를 완전히 살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6개월여에 걸친 산고 끝에 본회의를 통과한 친일진상규명법은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와 법제사법위원회·법안심사소위를 오가는 심의과정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본래의 모습을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훼손의 일등공신은 국회 법사위원회였으며 그 중에서도 법안심사소위의 김용균 한나라당 의원의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무단적 횡포가 특히 돋보였다.
국회 법사위가 본회의에 회부한 최종 수정안을 보면 현실인식에 따라 법지식이 이렇게도 악용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경탄 아닌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이리도 철저하게 입법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는지, 그 집요함과 치밀함에 경악하면서 한편으로 무엇이 이들을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는지 새삼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정신사를 바로잡을 반면교사라 할 친일진상규명법은 심의라는 명목 아래 갖은 수모를 당한 끝에 명목만 남은 법안이 되고 말았다. 야당은 처음부터 과거사청산의 의지가 없었으며 오히려 입법 저지의 명분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심의회피, 법안계류, 지연, 불참 등 전형적인 법안 폐기방법을 모두 동원했으며 최후에는 법사위를 통과한 법안의 본회의 상정을 보류하는 무리수까지 강행하였다.
이들은 입법 취지가 진상규명에 있는데도 갈등과 분열을 우려하거나 친일파 후손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는 등 해괴한 이유마저 들면서, 사실상 진상규명을 저지하는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누더기 법안으로 전락시켰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명예훼손이라면 이 사회는 거짓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말인지 반문하고 싶을 뿐이다.
법안심사소위의 한나라당 간사인 김용균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은 심의과정에서 본질을 벗어난 문제제기와 몰가치적인 행태로 일관하였다. 김 의원은 수차례에 걸쳐 무리한 삭제와 자구수정, 단서조항의 추가를 요구하고 이 모든 것이 수용된 뒤에도 법안 상정에 반대하여 그 저의를 의심받았다. 특히 진상규명 활동에 대한 위원회의 배타적 권한을 신설하여 민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친일청산 노력조차 족쇄를 채워버리려는 불순한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 수정한 법안을 거듭 손질하면서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다수의 친일 피의자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또 특정인을 의식해 조사대상을 축소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원안에 장교 이상으로 되어 있던 군 관련 친일혐의자를 중좌 이상으로 제한하여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면죄부를 발행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친일군인에 해당하는 자가 극소수로 제한되는데도 민주당 조재환의원은 오히려 박근혜의원을 들먹이면서 이 법안이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공격하는 망발을 자행하였다. 급기야 본회의 표결에서 법안에 반대표를 행사한 한나라당 김광원의원은 본회의를 앞두고 열린 비공개 의총에서 북한의 친일파 숙청을 거론하면서 마치 이 법안을 추진하는 세력이 용공세력인양 몰아갔다. 홍사덕 당시 한나라당 총무도 여권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를 악용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친일청산 움직임에 마치 배후가 있는 듯이 암시하여, 어떻게든 법안을 저지해보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들이 제기한 일련의 불가론은 해방 후 친일파와 그 비호세력들이 과거사청산에 반대하면서 쏟아놓은 각종의 궤변들, 즉 전민족공범론·상황론·생존생계론·민족화합저해론·색깔론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반세기를 초월한 역사인식의 일치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반성이 없으면 과오가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일들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떠한 연유에서 유독 이 문제에 과민반응을 보이며 금기시하는 것일까. 친일의 원죄를 벗지 못하고 있는 수구언론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가. 지지기반인 기득권세력을 의식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정당이 가지는 태생의 한계 때문일까. 지금 해방 후의 한민당을 떠올리고 친일군인 박정희를 떠올리면서 그 본류와 아류를 분간해보니 해답이 나올 듯도 하다. 이러고 보면 친일세력의 영향력이 이 사회에 얼마나 굳건하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기나긴 표류 끝에 만신창이가 된 누더기 법안마저도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 상정을 보류함으로써 폐기될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나마 실종 직전에 이른 법안의 명맥을 살려 놓은 것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갈구하는 국민들의 힘과 일부 양심적인 언론의 역할이었다. 일단은 법안 구하기가 급선무라고 판단하였기에 법안폐기에 대한 강력한 비판여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법안은 우여곡절 끝에 통과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안이 단 두 명을 제외하고 전원 찬성으로 통과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토록 법안 제정을 반대하던 야3당 소속의원들이 기꺼이 찬성으로 태도를 돌변한 것은 이들이 이 법안의 취지에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법안 조문 곳곳에 친일행위 진상규명활동을 근본적으로 무력화할 독소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친일진상규명법은 진상규명저지법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입법과 동시에 개정을 준비해야 할 오욕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독소조항들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누더기가 되어버린 제2의 반민법

1. 특별법 시행의 정당성을 위태롭게 하는 위헌적 요소
제5조 3항의 위원 규정에는 ‘국회의 추천을 받고자 하는 자는 본인의 부모 및 조부모가…친일반민족행위를 하지 아니하였고…친공반민족행위를 하지 아니하였음을 소명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핵심은 물론 후자이며 국회 추천과정에서 위원후보를 겁박하고 흠집 내기위한 복선이 깔려있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연좌제와 색깔론까지 들어간 기상천외한 조항을 슬며시 끼워 놓은 것이다. 친일행위자 후손들의 명예훼손을 이유로 법제정에 반대한 자들이 위원자격에는 연좌제를 적용하다니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또 제23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조항에는 ‘②누구든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의 기간 중 행정기관·군대·사법부·조직·단체 등의 특정한 지위에 재직한 사실만으로 그 재직자가 이 법에 의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신문·잡지·방송(인터넷 신문 및 방송을 포함한다) 그 밖의 출판물에 의하여 공표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모호하고 임의적인 규제항목을 적시하고, 이어 제29조의 벌칙 조항에서 ‘①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2. 제23조제2항의 규정을 위반하여 공표함으로써 사람 또는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한 자’라고 하여, 엄중한 처벌규정을 둠으로써 헌법상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의 자유·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이 같이 무리한 조항을 둔 이유는 진상규명의 권한을 위원회가 독점적으로 수행케 하여 민간 학계의 연구조사나 언론의 추적 보도가 아예 불가능하게 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 내용의 개악
첫째, 제 2조 반민족행위에 대한 정의에서 친일행위의 범주를 대폭 축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사대상을 대폭 제한하고 있다. 우선 ‘창씨개명 주창 권유자·신사(神社) 조영(造營)위원·부(府)도(道)의 자문결의기관 의원·읍면회 의원·학교평의회 의원·하급 경찰관·헌병·헌병보조원·일제로부터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조선사편수회 관여자·토지조사사업 등 경제 수탈 종사자’ 항목을 모두 삭제하였고, ‘사법부는 서기·집달리·형무관리를 제외한 판·검사, 관공리는 고등문관 이상, 군은 중좌(中佐) 이상, 헌병은 분대장 이상, 경찰은 간부, 독립운동 탄압 단체와 제국주의 통치기구는 직원을 제외한 장(長)과 수뇌간부’로 제한하여 극악한 친일분자라 할지라도 절대 다수가 면죄부를 받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예상된다. 이와 같은 범주대로라면 해방 후의 친일파 규정보다도 크게 후퇴한 내용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여기 제외된 부류들이 대체로 어떤 의식구조 아래 무슨 기능을 수행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관철시켰다면 바로 친일파 비호세력이란 비난을 받아도 마땅할 것으로 본다.
한편 친일 문화기관이나 단체, 경제 수탈 기구의 경우 중앙조직으로 한정하였으며,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권유하거나 강요한 행위,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제공한 행위, 언론·예술·학교·종교·문학 그 밖의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찬양하고 내선융화·황민화운동에 앞장서거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행위,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을 생산하고 자원을 제공한 행위 또는 이를 위하여 거액의 금품이나 비행기 등을 헌납한 행위, 민족에게 경제적인 고통을 가한 행위 등’을 전국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만으로 대상을 한정함으로써 지역 단위의 반민족적 부역 행위에 대한 조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이 외에도 ‘적극협력’, ‘중심적으로 수행’, ‘집행을 주도’, ‘자발적 헌납’ 등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자구를 추가하였으며, 사법·경찰·헌병기구 복무자의 경우에는 감금·고문·학대 등 구체적 범죄행위를 적시하여 증거가 제시되지 않으면 모면할 수 있게 의도적으로 장치를 마련하였다. 전반적으로 보아 법망을 피해 빠져나갈 온갖 장치를 요소마다 마련함으로써, 본래의 입법 취지가 실종되고 허울만 남은 법안이 되고 만 것이다. 이는 처벌을 전제로 한 반민법과 비교하여도 피의자를 터무니없이 축소한 내용으로 여기에 해당될 자는 현저한 반민족행위자 극소수에 그칠 것이 자명하다. 이 같은 진상규명이라면 기왕에 행해진 연구조사만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혈세를 들여 특위를 운영할 이유가 없다 하겠다.
둘째, 조사 대상자와 가족 등 이해관계인들의 이의신청 권한과 보호를 받을 권리·의견 진술권·증거자료 열람 청구권 등은 대거 신설하거나 강화시킨 반면, 위원회의 조사권은 각양의 단서를 달아 규제함으로써 적극적인 조사활동을 사전에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즉 조사 착수 때 통지의 의무·공적(功績) 조사를 병행해야 할 의무·사생활 및 명예 등을 보호해야 할 의무·비밀유지의 의무 등 위원회가 조사대상자에 대해 져야 할 책임과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규정이 크게 늘어났다. 다른 조항은 윤리적 의무라 치더라도 독립운동 관련 사실 조사를 병행해야한다는 의무조항은 친일의 죄과를 희석시키려는 포석에 다름 아닐 것이다. 더욱이 두 얼굴을 지닌 가짜 독립운동가가 버젓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희극적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억지는 공과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조사대상에 대한 각종의 보호규정에 비해, 이와 대조적으로 협박과 위해를 당할 개연성이 다분한 위원회와 위원들에 대한 보호장치와 처벌조항은 과감히 삭제해버려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과거의 반민법이 위원회의 권한과 신변보호를 중요하게 고려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셋째, 위원회 조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소속 특위 위원의 추천권을 국회가 독점적으로 행사하게 해 놓았다. 이는 통상 관례나 다른 특별법에서도 전례가 없는 것으로, 설령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국회 다수당의 의중을 반영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삽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한나라당이 비록 다수당의 지위를 잃었으나 이 조항을 그대로 둘 경우 입법 반대세력이 상당수 위원을 추천하여 결국에는 특위를 공전시킬 화근으로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위원장을 포함한 모든 위원들을 비상임으로 하여 효과적인 운영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대통령의 위원장·상임위원 임명권과 위원장(정무직)·상임위원(별정직 공무원 1급)에 대한 예우 조항을 삭제하였고 임기마저 3년으로 단축시켜 위원회의 권위와 안정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또 조사를 직접 수행할 사무국을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였으며, 조사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였다. 또 자료요구시의 강제이행규정을 약화시켜 부실조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된다. 위원회의 성패가 조사의 충실 여부에 달렸다면 조사대상을 제한하고 조사권한·인력·기간을 최소화시킨 점은 출발도 하기 전에 손발을 묶어버린 형국이라 할만하다.
대략 살펴보아도 훼손의 정도가 너무나 심각하여 법사위가 개악통과된 법을 시행하였을 때 발생할 부작용을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법을 적용하게 되면 우선 식민지 조선의 정신세계를 오염시키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앞장서 찬양 미화하였던 수많은 친일 문화예술인·언론인·교육자·지식인 대다수가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어 혐의를 벗을 빌미를 주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들의 죄상은 그들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일신의 부귀영화나 출세를 위해 일제에 빌붙었던 자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민족이 고난에 빠졌을 때 지성계의 책임은 더더욱 막중한 것이다.
다음으로 일선의 부역행위를 도맡아 민중을 죽음과 도탄의 늪으로 몰아넣거나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섰던 가혹한 식민지 지배의 하수인들이 모조리 면책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존중되어야하나, 조사 후에 엄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지 혐의의 중대성과 무관하게 단지 말단이라는 이유로 사전조사마저 배제한다면, 법집행의 형평에도 어긋나는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한편 위원회가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진상규명 작업을 수행하기에는 권한은 너무 적고 제약이 많은 운영체계상의 결함이 두드러진다. 또 입법목적의 달성을 판가름할 광범위한 사료조사와 증언 수집을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기간과 최소한의 조직도 일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나마 국민적 지지 아래 힘을 얻어 추진되고 있는 민간의 연구를 크게 위축시킬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사 청산의 방향
결국 이 법은 이대로 시행되어서는 아니 될 악법임이 분명해 보인다. 국가가 나서서 과거사청산을 추진하는 일이 민간 차원의 노력과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점을 백번 고려해도, 법제정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독소조항을 갖고 있는 한, 법 개정은 불가피하다. 국가의 정체성·도덕성과 관련되는 사회적 합의와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제 새로이 구성될 17대 국회에서, 보다 엄정하고 체계적인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국가적 역사청산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미 법안 추진의 당사자인 김희선의원을 비롯한 ‘민족정기를세우는의원모임’ 소속의원들이 법안 통과 뒤 바로 기자회견을 갖고 법 시행 시기인 9월 이전 개정을 약속했으며, 여당이 총선공약으로 채택하고 총선 이후에도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전면 개정을 추진할 것임을 재확인 한 상태이다.
개정안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모두 해소되어야만 한다. 또 조사권의 강화도 이루어져야 기존의 각종 특위들이 겪고 있는 장애요인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의 범주는 학계에서 이미 상당 수준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특위의 조사보고서가 굳이 반민족행위자를 규정하여야 한다면 학계의 지배적 견해를 수용하면 될 것이다. 더불어 반세기를 넘어 추진되는 민족사의 과제인 만큼 개정을 포함한 입법과정에서부터 각계의 전문가가 참여하여야하고 특별위원회의 구성 등 중요 사안에는 반드시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 또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기적으로는 제 2의 반민특위가 생산한 결과물에 대한 활용방안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모처럼 얻어진 결실들이 사장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교육현장으로서 ‘친일문제 역사자료관’ 건립도 적극적으로 검토해볼만하다. 이를 포함하여 일제강점기의 친일문제나 강제동원 등 과거사를 지속적으로 연구 조사하고 체계적으로 자료화할 수 있게 정부 출연의 ‘과거사 재단’을 설립할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다. 굳이 다른 나라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조사 대상과 자료의 방대함이나 추가 조사가 불가피한 점을 감안할 때 몇 년간의 특위 활동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남북간 공동의 근대사인식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어야 하리라 본다.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등 수탈사나 친일문제는 남북 학자들의 공동연구가 비교적 용이한 분야라 할 수 있다. 민족 내부의 화해와 통일의 토대 구축을 위해서라도 접근이 가능한 부분부터 공동조사나 연구에 착수해야 할 것으로 본다.
거듭 말하지만 민족문제는 특정세력의 이해관계나 당리당략에 따라 좌우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정치권은 정파적 태도를 버리고 법안 제정의 근본 취지를 되살려야 한다. 한나라당은 국민여론과 총선민의에 따라 이제 과감히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언제까지 역사의 걸림돌, 수구냉전세력이라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진정한 보수의 길을 외면할 것인가. 보수란 건전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지 비뚤어진 기득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님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내년은 우리 근현대사를 폭넓게 자성해보는 한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2005년은 치욕의 을사늑약 100주년이며 해방 60돌인 동시에 굴욕적인 한일협정 40주년으로, 우리에게 새삼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하는 의미 있는 시점이다. 일본에서는 올해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아 옛 영광을 회고하는 복고적 우경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경향을 우려하기에 앞서 우리 내부는 어떠한지 돌아볼 때다. 과연 우리는 과거사를 극복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한일 양국은 식민지 피해자와 가해자이면서도 역사인식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일제잔재의 극복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까지 과거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미래를 향한 전진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한일 양국의 시민민주주의의 힘에서 미래 한일관계도 결정적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민족 내부의 과거사 청산이 절실한 이유도 한일간 과거사 현안의 구조가 표리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사청산은 결코 보복이나 단죄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진실규명의 토대 위에 반성과 화해를 추구함을 목표로 한다. 많은 이들이 본인이나 연고자의 친일전력을 고백하고 역사 앞에 반성하면서 화해의 길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행위가 갖는 현재적 의미는 원죄를 반성함으로써 미래 설계에 동참할 도덕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반성은커녕 죄상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공로를 내세우는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나 문제는 그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사회의 주류로 공고히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의 행태도 이제 종언을 고해가고 있다. 역사인식에 있어 획기를 그을만한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더 이상 상식과 원칙에 배치되는 현실을 묵과하지 않는 시민대중의 실천적 역량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민족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격동의 20세기를 겪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 세기를 규정할 지난 100년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진단이다. 자랑스럽든 치욕적이든 역사의 진실 규명은 새로운 출발과 변화를 위한 선결조건이다.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적실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모두에게 필요한 때이다.

* 위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제16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2004/04/22 [12:09] ⓒ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