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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판도라의 상자 열릴 것인가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02-15
한일관계, 판도라의 상자 열릴 것인가
[속보, 사회] 2004년 02월 14일 (토) 15:12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2월 13일 오후 1시 30분, 일제강점하 피해자 200여명은 서울행정법원에서 '한일협정외교문서정보공개거부처분취소소송'의 판결을 초조한 마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년이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지 60주년을 맞는 해이건만 이들은 그동안 왜 강제노역한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지, 강제로 끌려간 이후 생사조차 모른 채 가족이 버려져야 했는지, 꽃다운 어린 나이에 근로정신대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모진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서 공식적인 사죄 한마디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지, 원폭피해의 그늘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는지, 사할린 동토에서 귀환조차 못한 채 술과 시름의 세월을 보내야 했는지, 그리고 희생자의 유골조차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이날 판결에서 피고인 외교통상부장관에게 한일협정 외교문서 가운데 개인청구권과 관련한 문건 5건에 대해 공개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은 이날 법정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당혹해 했을 것이다.


이번 판결은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과 '외교문서보존및공개에관한규칙'이라는 2중의 장벽을 넘는 획기적인 판결이며,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판결이다.


정보공개소송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비교적 관대한 판결들이 많았다. 그런데 외교적인 마찰을 가져올 수 있는 문건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본에서도 관련 소송이 전무하며(필자가 본 소송을 제소하기 이전에 판례를 검토하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에게 문의한 결과), 더군다나 국내에서 정보공개법이 만들어 진 이후 처음 있는 소송이었다.


그동안 당연시 해 왔던 국익이라는 절대가치와 개인의 권리가 맞부딪쳐서, 결국 개인의 존엄한 가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외교통상부는 특별할 게 없다는 식의 논평을 했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외교통상부는 한일협정과 관련한 일체의 문건이 공개될 경우 한일관계의 손상, 북일수교에 미칠 영향 등을 들며 재판부를 집요하게 압박했다. 특히 개인의 청구권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미 소멸되어 원고들이 얻을 법적 이익이 없다는 식의 논리까지 동원했다.


특별할 게 없는 문건이었다면 정보공개법이나 외교부 규칙에 따라 30년이 지난 문서는 마땅히 공개되어야 했다. 그러나 외교부는 관련문건 뿐만 아니라 왜 이 문건이 비공개 결정이 내려졌는지 회의록조차 공개를 꺼려했다.


이제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는 키는 재판부에서 외교통상부로 넘어갔다. 진정 한국의 외교통상부가 일본의 외무성이 아닌 이상, 자국민이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바람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외교부 관료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김은식 기자 (victims2000@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