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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3.1절은 섭섭한 날"-이옥선 할머님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11-03-03
어제는 3.1절이었습니다. 곳곳에서 기미년 3월 1일의 만세 운동이 재연됐습니다. 민족 대표 33인을 대신해 지역 유지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 마치 '3.1운동 재연행사' 매뉴얼처럼 여러 곳에서 반복됐습니다. 어느 곳을 가나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선두에 섰습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머물고 있는 '나눔의 집'에서는 누구도 자랑스레 앞줄에 서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선 '자랑스런 애국열사' 대신 가장 비참한, 그러나 아직도 사과조차 받지 못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SBS 기자를 만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이옥선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삼일절이라믄 (울먹) 우리 같은 사람은 다 섭섭한 날이지.(울먹) 그렇지만 우리는..."

3.1운동 정신은 헌법 전문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3.1절은 독립 국가를 수립한 우리 국민 대부분에게 자랑스런 기념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일본의 사죄도 받지 못한 할머니들에게 3.1절은 자랑스런 날이 아니라, 더 섭섭한 날입니다.

"어떤 할머니는 위안부 갔다온 게 무슨 큰 대학이나 갔다온 거 처럼 나는 그렇게 하고싶지 않아요. 나는 위안부 간판 안 내놓고 중국에서 죽을라고 했는데 어떻게 되서 같이 있던 할머니가 둘이 약속하기로 우린 위안부 간판 내놓지 말고 중국에서 죽자 이랬는데 그 할머니가 환경의 지배를 받아 조금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니까 한국에 나왔다가 위안부 간판 내 놓은 거에요. 같이 한 집에 있는 사람이니가 제가 소갤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저도 할 수 없어 간판을 내게 됐어요."

'위안부 간판', 이옥선 할머니는 대화 내내 이 단어를 여러번 입에 올렸습니다.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내놓고 싸우는 할머니들의 복잡한 심경이 짐작됐습니다.

"7살부터 학교를 갈라해도 저도 제 나라가 없어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이 곤란해서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어요. 저도 골이 좀 총명했다는데 이젠 바보가 됐는데 공부를 할라고 그렇게 우는데 어느 때까지 울었는가 열다섯살까지 울었어요. 열다섯살까지 울다울다 어디를 갔는가면 학교를 못가고 일본놈한테 끌려갔어요."

할머니는 공부를 못해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끌려갔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조국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의 조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일본에 대고, 일본 사람이 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에 과거에 천황폐하가 정치를 잘못했다는 거지. 이제 천황폐하하고 우리가 싸움을 해야하는데 이제 없잖아요. 그럼 누구하고 싸워야 해요. 이래서 일본 정부에 대고 너네 해결해라 왜 우리를 가져다가, 사죄해라 사죄해라. 그 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면 우리 열다섯살 순정을 제대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못 만들어주죠. 죽어도 열다섯살 순정을 어떻게 만듭니까. 그런데 왜 할머니들 다 죽기를 기다리고 산 거에 사죄를 안 합니까. 빨리 사죄를 하라는 거죠. 사죄만 하면 다 해결되는 거지."

올해가 92주년 3.1절입니다. 일본과 한국은 이제 과거를 넘어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은 아직도 '사죄의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가운데 올해만 벌써 5분이 돌아가겼습니다. 그리고 생존한 나머지 75분에게 3.1절은 여전히 '섭섭한 날'입니다.

1. 기사원문보기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868417

2. 3.1절 행사 동영상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86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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