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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봉하쌀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9-11-21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봉하쌀


최민희 / 상임 운영위원․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굴절된 현대사의 아픔을 구석구석 안고 있는 할머니들이 사시는 경기 남양주 퇴촌 '나눔의 집'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합니다.” (최초의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 1991년 발언)


만남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경기 남양주 퇴촌 ‘나눔의 집’으로 향하는 짧은 여정은 흔쾌하지 않았다. 굴절된 현대사의 아픔을 몸 구석구석에 안고 있을 할머니들을 보러 가는 길이 어찌 흔쾌할 수 있으랴.

훌쩍 쌀과 떡, 과일을 건네고 두 시간 여 머물고 돌아가는 ‘손님’들로 혹여 할머니들 마음이 산란해질까 저어하는 마음도 있었다. 가는 길, 퇴촌이 사람들 많이 모인 도회지와 가깝지 않아서 ‘할머니들이 나눔의 집을 또 다른 수용소로 느끼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까지 얹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나눔의 집에 도착하여 17여 분짜리 영상물을 보고 할머니들이 계신 곳으로 이동하여 덤덤하지만 따뜻한 마중을 받았을 때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대장할머니’ 김군자 할머니의 말은 걱정과 염려를 한방에 날려버려 주는 듯했다. “왜 남자는 안 오고 여자들만 왔어...” 그리고 할머니들은 “권여사가 오시는 줄 알았어...” 하고 말을 이었는데 가슴 가득 슬픔을 안고 살아온 할머니들이 권여사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위로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해져왔다.

할머니들은 너도나도 ‘올해는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노 대통령, 김 대통령까지 큰 별이 여럿 졌어...’ 하시며 회한을 감추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당신들은 조계사로 문상 갔었다는 말을 할 땐 주름진 눈가로 마른 물기가 배여 나왔다.






식당에서

할머니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식당은 열 대 여섯 명이 모여 함께 밥을 나눌 정도의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봉하쌀로 지은 윤기 흐르는 밥에 배추김치와 알타리김치만으로 먹어도 맛이 있었다. 남자조리사가 오늘 밥 담당이라 하여 기대하지 않았는데, 된장국에서도 감칠맛이 났다. 할머니들은 거동이 불편한 몇 분만 빼곤 직접 밥을 떠다 드셨다.

운동 겸 놀이 겸 밥을 뜬다며 할머니들은 우리들의 서비스를 한사코 거절하셨다. 점심식사 시간을 반긴 것은 재단에서 간 ‘손님’들이었다. 오전 9시까지 재단으로 모이라는 ‘지침‘에 따르기 위해 아침을 걸렀음이 분명한 자봉들과 그 일행들은 정말 맛있게 점심밥을 먹었다. 게다가 디저트로 가져간 시루떡과 과일을 먹으면서 연신 “맛있다, 맛있다” 연발한 것도 재단에서 간 자봉들과 그 일행이었다.

전시관 관람

나눔의 집을 나서기 전 일행은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나눔의 집에서 공익근무를 하면서 일어가 능통해졌다는 공익요원의 안내로 우리는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전시관은 제 1전시장-증언의 장, 제 2전시장-체험의 장, 제 3전시장-기록의 장, 제 4전시장-고발의 장, 제 5전시장-정리와 맹세, 제 6전시장-옥외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할머니들이 직접 만든 작품들이었다. 특히 고 강덕경 할머니와 고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들은 ‘수준급’이었다. 작품기교도 빼어났을 뿐 아니라 작품 속에 깃든 ‘혼’이 어떤 그림에서는 ‘슬픔’으로, 어떤 그림에서는 ‘질책’으로 다가와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과 ‘못다 핀 꽃’이라는 그림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눈앞에 선할 정도로 메시지가 강렬했다.

제 5전시장에 ‘할머니와 우리들’이라는 작품 아닌 작품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들이 양 손바닥을 눌러 직접 이름을 새긴 작품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잔혹한 기억을 품고 험한 세월을 인고해온 할머니들의 한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와, 마치 우리들 가슴에 찍히는 듯 싸한 슬픔이 밀려왔다.







돌아옴

늘 이런 행보 뒤 밀려오는 감정들로 일행의 마음은 복잡했다. 아쉬움, 미안함, 죄스러움, 분노 류의 감정들이 뒤엉켜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재단을 출발할 때부터 일행을 사로잡은 흔쾌하지 않은 감정이 다시 우리를 감싸왔다.

우리들은 이런 일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 나눔의 집 같은 곳은 접근성이 좋은 곳에 지어져야 한다는 것, 동네 가까이 있어 양로원처럼 운영되면 할머니들도 아이들도 할머니들을 자주 볼 수 있어 여러모로 좋다는 것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서 온 주부 서상희씨. 오십을 몇 년 앞두고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기꾼 자봉’이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사는 아이디 ‘천사의 하품’님은 너무 날씬해서 여성에게 모성애를 유발했음에도 쌀을 번쩍번쩍 드는 괴력을 발휘했다. ‘마당’님이 찍은 사진이 어떨지 내 궁금하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서 온 손홍열님은 이쪽 자봉으로 오기엔 덩치가 아까웠다. 쌀 한가마는 족히 들 수 있음직 했다. 지난 9월 나눔의 집에 와 지금까지 머물고 있는 아씨쯔카 카요코는 해맑은 일본 여대생이다. 그 외 일행으로는 정영애 전 청와대 인사수석, 시민주권모임 권오중님, 재단의 고재순 사무차장 등이 함께 했다.

나눔의 집에는 강일출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 문필기 할머니, 김순옥 할머니, 박옥련 할머니, 박옥선 할머니, 배춘희 할머니, 이옥선 할머니, 지돌이 할머니 등 아홉 분이 머물고 계신다. 나눔의 집 전화번호는 031-768-0064이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있다. 나눔의 집에서는 주방자봉, 대화자봉 등을 상시 모집하고 있다.


원문보기 : http://www.knowhow.or.kr/foundation_news/view.php?start=0&pri_no=999658817&mode=&total=33&search_target=&search_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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