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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어도 역사는 남아야지”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3-07-21
“우리는 죽어도 역사는 남아야지”


‘평화박물관 건립’ 공동대표 이옥선 할머니 “‘다시는 전쟁은 안된다’는 것을 수백만이 함께 외친다는 거죠.”
2003년 7월9일 낮 12시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일본대사관 앞. 이날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566차 수요시위'에 참가한 이옥선(77) 할머니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비쳤다. 유달리 거세게 쏟아진 빗방울 탓인지, 요즘 들어 가뜩이나 심해진 '가슴 답답증' 탓인지 할머니는 집회 내내 웃지 않았다.

그런 이옥선 할머니에게서 웃음을 끌어낸 것은 최근 할머니가 공동대표를 맡은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 운동’이다. ‘평화’와 ‘박물관’이야말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1992년 1월8일부터 지금까지 11년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일본대사관 앞에 나선 이유다. 따라서 한겨레신문사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준)가 함께 벌이는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일본대사관 앞에서뿐만 아니라 교실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외친다는 의미다.

“평화박물관 운동이 전쟁으로 상처입은 사람들 마음도 달래줬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팔을 내밀었다. 거기엔 할머니의 불행한 한 평생을 증거하는 칼자국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할머니는 16살 꽃같은 나이에 중국에 진출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가 58년 만인 지난 2000년 6월1일 영구귀국했다. “일본 군인들이 노리개로 가지고 놀다가도 말을 안듣는다며 칼로 온몸을 난도질하곤 했지.”

할머니는 “전쟁은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안타까움은 자신과 위안부 할머니에만 머물지 않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향한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라크 전쟁 보도도 관심있게 지켜봤고, 또 현재 북-미간 핵 갈등으로 높아진 한반도의 긴장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런 할머니에게 평화박물관은 사랑나눔터다.

할머니가 ‘평화박물관’에 애정을 갖는 데는 이런 인연도 있다. 영구귀국 당시 할머니는 1년 먼저 중국에서 귀국한 고 문명금 할머니의 모습을 감명깊게 지켜봤다. 당시 문 할머니는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 등 4300만원 전액을 같은 해 6월5일 시민단체인 국제민주연대에 기부했다.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해 써달라는 게 목적이었다. 이옥선 할머니는 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해 11월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래서 할머니는 평화박물관을 짓는다고 할 때 선듯 공동대표를 맡아 나섰다. 왠지 그것이 문 할머니 등 먼저 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도 역사는 남아야지 않겠소.”

수요집회를 시작할 때 확인된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209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32명만이 살아 있다. 대부분 70대 후반의 연로한 나이다. 따라서 이제 앞으로 10년 뒤면 지금 살아계신 132명 중 누가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후손에 전해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특히 중요한 것이 기록이다. 할머니에게 박물관 건립은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11년간 계속된 피맺힌 절규를 후대에 전해줄 사업인 것이다.

“평화박물관이 많은 사람들을 살렸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평화박물관에 거는 기대다. 할머니는 가족들의 사망신고로 귀국 뒤에도 1년7개월이나 한국 국적을 갖지 못했다. 나눔의 집 등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죽었던 국적을 살렸을 때 할머니는 다시 울었다. 살아있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세상이 철저히 나를 버린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할머니는 아직도 죽어 있는 것들이 많다고 느낀다. 이념 갈등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평화박물관은 이런 죽음을 살리는 생명터다.

김보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업국장 tree21@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