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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정신대 소송 지원한 일본인들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04-05-07
10년 넘게 정신대 소송 지원한 일본인들

[오마이뉴스 2004-05-06 11:24]

[오마이뉴스 이국언 기자]

▲ 단촐한 먹거리 앞에 가장 귀한 얼굴들이 마주 앉았다. 한 할머니가 관부재판 지원단 일행에게 과일을 건네고 있다. 다른 한 할머니는 한사코 카메라를 피한다. 아직도 자신의 젊은시절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2004 오마이뉴스 이국언


"재판정을 나오면서 일본 사람들 전부 죽여도 분이 안 풀리겠다고 대성통곡하던 할머니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신대에 끌려가 여자의 한 인생이 어떻게 뒤바뀌게 됐는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2일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위안처이자 사랑방인 광주유족회 사무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 들었다. 위안부·근로정신대 전후 배상 소송의 하나인 '관부재판'을 10여년 넘게 지원해 오고 있는 일본 '관부재판 지원회' 일행들이 그들.


마쓰오카 스미꼬(59·松岡燈子) 회장을 비롯한 5명의 일행들이 한국을 찾은 것은 지난달 30일. 이들은 1주일여 일정으로 관부재판 원고단을 찾아 근황을 살피는 한편, 오는 7월 후찌코시 법정에서 열릴 예정인 또 다른 소송변론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병세가 위중한 '나눔의 집' 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찾아뵙는 것도 중요한 일정중의 하나이다.


'관부재판 지원회', 10여년 넘게 정신대 할머니 지원 펼쳐


손바닥만한 좁은 사랑방에 금세 웃음꽃이 묻어난다. 팔순에 가까운 할머니들 모습 같지 않게, 이날만큼은 더 없이 천연덕스럽고 밝은 표정들이다. 멀리서 달려온 손주나 자식을 맞는 것처럼, 넉넉하고 가벼운 웃음이 온방 가득하다. 벌써 10년 세월을 넘긴 인연들이다.


관부재판이 시작된 건 92년부터.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위안부나 근로정신대(강제노동)로 끌려간 피해자 10명이 원고가 돼, 일본정부를 상대로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다. 올해로 꼭 60년 전 일이다. 당시 12∼13살 된 앳된 소녀들이었던 이들은, 이제 세월을 넘어 어느 덧 인생의 끝자락을 달려가고 있다.




▲ 한쪽 귀에 보청기를 댄 이금주 광주유족회장이 가까이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왼쪽은 하나부사 도시오(花房俊雄) 지원단 사무국장. 가운데는 그 부인.

ⓒ2004 오마이뉴스 이국언

이 소송은 지난해 3월 최고 재판부의 상고심 기각으로 최종 끝이 난 상태다. 98년 1심 재판부에서는 전후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 중 최초로 일본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그 뒤 고등재판부에서 뒤집어지고 말았다. 11년째 이어 온 법정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징용, 징병, 노무, 정신대 등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와 유족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초. 그동안 정부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진 사람들이었다. 양모(77) 할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하나 어떻게 사는지 물어 본 사람도 없다"고 정부를 원망했다. 가난과 병마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들이다.


육체적 고통보다 심한 것이 정신적 상처였다. 위안부는 말할 것도 없고, 강제노동에 끌려 다녀 온 사람들 대부분도 정상적인 가정을 이뤄보지 못했다. 오가던 혼담이 깨지는가 하면, 뒤늦게 어디서 소문을 들은 남편들은 그때부터 바깥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부정(不貞)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더러는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필설로는 다 못할 한을 안고 살아온 이들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것. 이는 칠순 고령에도 10년 넘게 현해탄을 넘나 든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이면서도 죄인취급을 받아야 했던 이들의 애절한 투쟁 곁에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관부재판 지원회'가 있었다.


패소불구 활동 전개 "친부모도 그렇게는 못해"



'지원회'와 함께 하는 시민들은 약 500여명. 이들은 매번 재판이 있을 때마다 원고들의 침식은 물론 항공료 등 일체의 체류비용을 지원해 왔다. 증거자료 수집 차 한국을 다녀간 것만도 7∼8차례. 재판 전후로는 소식지를 별도 발행해 각계의 관심을 불러모으기도 했다.




▲ 관부재판 소식지, 회원들과 관심있는 시민들한테 배포된다. 최근 44호를 발간했다. 소식지 하단 사진은 지난 3.17일 수요집회 600회를 맞아 일본 후꾸오카 최고 번화가에서 열린 선전전이라고.

ⓒ2004 오마이뉴스 이국언
이들의 각별한 성의는 오히려 최고재판부에서 패소 한 다음부터다. 지난해 최고재판부에서 패소한 3개월여 뒤인 6월, 17명의 지원단 일행이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상심한 마음을 다소라도 위로한다며 할머니들을 온양온천으로 초대한 것. 이금주(84) 광주유족회 회장은 "가족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소송이 최종 종결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지원회'는 해산되지 않고 여전히 활동을 전개 중이다. 최근에는 소식지 44호를 통해 일본대사관 앞 정신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600회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마쓰오카 스미꼬 회장은 "1심 판결에 따라 조금씩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억울하다"며 "활동을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입법활동을 통해 실마리를 찾겠다"고 말했다.


"최고재판부에서 기각됐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일본의 행태로 봐 쉽지 않아 보이지만, 희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이분들이 살아 계실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게 됐지만…."


내년이면 해방 60년. 피해자들에게도 남겨진 시간도 그만큼 많지 않다. 관부재판 원고 중 1명의 위안부는 지난 2002년 소송도중 사망했다. 재판에 진 것을 자신의 잘못인양 거듭 미안해하는 이들 앞에, 우리는 정작 얼마나 떳떳할 수 있나.



"할머니들 보면 오히려 힘 솟아"
관부재판 지원회, 하나부사 도시오(花房俊雄) 부부


지원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하나부사 도시오(60·花房俊雄). 그는 부인인 하나부사 에미꼬(59·花防惠美子)와 동행하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유명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혼자 하기엔 힘겨운 일 아니냐는 질문에, 대뜸 웃으며 "혼자는 힘들다 보니, 둘이서 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는 "1심에서 일부 승소한 것은 획기적 의미의 판결이었다"며 "고등재판의 판결을 보고 일본이 식민지 침략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많지 않다"며 "전후 문제 해결이 쉽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질문마다 무겁게 말문을 연 그는 간혹 긴 숨을 들이키는 것으로, 두 나라 사이에 놓인 역사의 간극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사법부의 판단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가 달라져야 한다"며 "실망하다가도 할머니들이 힘을 내는 것을 보고 나도 힘을 낸다"고 말했다.


지원단 일행은 5일까지 병고에 시달리는 춘천유족회장과 광주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 위로한 후 6일 한국을 떠날 계획이다 / 이국언 기자






/이국언 기자 (road819@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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