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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자 할머님 타계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1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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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2017년 7월 23일, 오전 8시 4분, 노환으로 타계>>
1926년 강원도 평창군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남.
1942년 중국 훈춘으로 끌려감.
1945년 중국에서 걸어서 귀국하여 혼자 생활.
1998년 나눔의 집에 입소
2007년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미국 하원 결의안 청문회 참석 증언.
2017년 7월 23일 오전8시 4분 노환으로 타계.
<장례절차>
장례식장 :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 특실(지하 1층)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351번지
발인 : 2017년 7월 25일(화)
장지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가새골길 85번지, 나눔의 집
연락처 : 나눔의 집(031-768-0064 / 010-2028-1097)

<<할머니 증언과 활동 기록>>
<김군자 '하루에 40여명 상대로 성노리개 생활'>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군자(1926년생)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1942년 우리 나이로 17살때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동원 됐다.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는 할머니는 "하루에 40여명을 상대로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위안소 생활을 기억했다.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체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증언했다.

또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등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자신처럼 부모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2000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퇴촌 성당에 학생들 장학금으로 1억 5천만원을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1998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 김군자 할머니 ‘16살때부터 3년간 지옥생활‘>

자살기도 7차례···'생전에 사과 받겠다', '내가 살아있는 한' 위안부에 대한 진실 알릴 것입니다."

김군자 할머니,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다.

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살에 부친을 14살에 모친을 잃으면서 고아가 됐다. 이후 친척집에서 자랐고 16살에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김 할머니는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중국 훈춘에 도착해서도 김 할머니는 돈 벌어오라고 보낸 줄 알았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그곳에서 일본 군인들의 성 노리개가 돼야했다. 저항하다가 맞아 왼쪽 고막이 터져 지금도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도망도 쳐봤지만 그때마다 들켰고 구타가 돌아왔다. '이렇게 살면 뭐하나…' 위안부 생활 3년동안 7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번번히 죽지 않을 만큼까지 맞았다. 죽지 못해 사는게 한스러웠다.

이후 고까시로 옮겨졌고 전쟁이 끝나자 한달 넘게 걸려 함경북도 성진에 도착했다. 두만강을 넘을 때는 함께 탈출했던 친구 1명이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죽을 고비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동거하며 잠시 행복했지만 남자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고 결국 남자는 자살을 택했다. 동거생활 3개월이 김 할머니에게 안긴 것은 임신. 오갈데 없는 김 할머니는 월남했고 겨우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도 5개월만에 숨졌다.

다시 혼자가 된 김 할머니는 숨어살았다. 김 할머니는 피해자였지만 사람들은 김 할머니를 피했다. 아니면 무관심하거나 외면했다.
98년부터는 나눔의 집에서 1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살고 있다. 

김 할머니의 생전 소원은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것이다. 배상을 받으면 사회에 기부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김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 부터 받은 정착금 4300만원 등을 모아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나눔의 집에 1000만원 한 천주교 단체에 1억 5000만원 등을 기부한 바 있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털어놓고 나면 가슴이 뛰고 악몽으로 잠을 설치지만 살아있는 한 그리 할 것이다. "짖밟힌 내 삶이 불쌍하고 억울해서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사과를 받아내야 합니다."